내가 뭐 할 줄 아는 게 있나?
처녀 적에는 먹고 자고 야근이 반복되어 일만 다니며 내 한 몸 건사하기만 하면 되는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니 해야 하는 집안 일과 해결해야 하는 숙제와 잠을 쫓으며 애써야 하는 일들이 모래알처럼 잡히지 않는다. 그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나만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냐고 지나가는 이의 멱살을 붙잡고 하소연하거나 싸다구라도 한대 때려야 속이 후련하며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많은 날들이 한순간에 지나갔다. 지나고 생각하니 내 몸에 여러 가지가 붙게 된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그림 그려주기'이다. 엄마는 만능이 되어야 하는데 나에게 책 한 권이 미술 선생님이 되는 기회를 주었다. 아이와 식탁에 마주 앉는다. 직장에 다니지만 주말이면 아이와 놀이를 생각하며 책을 주문한다.
책 한 권으로 우리 집에 세 가지를 선물해 주었다.
1. 아이의 색 감각
2. 아이의 연필 쥐는 힘
3. 나의 그림 그려주기 실력
다른 이에게도 선물해 줄만큼 애착을 가지는 책이다. 책을 펼치면 그 속에 사람, 새, 동물, 나무, 꽃, 벌레 갖가지 재미있는 그림들이 나온다. 그림이 재미없는 이에게도 연필로 쉽게 그리는 장면들이 자세히 표현되어 아무나 다 된다. 그림에 젬병인 나도 된다. 무수히 많은 책을 읽어주었는데 그림 그려주기에서도 역시 '또' 그려 달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 당시 '또'라는 말이 그렇게 힘겨웠는데 매일 같은 그림을 수십 장 그리며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억지웃음을 짓는다. 웃자. 웃자. 웃어보자. 억지 웃음이라도 지어보자. 그 에너지는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집에서 그림만 그려주었는데 아이의 학교생활에 도움이 된다. 모둠 활동, 발표, 독서록, 일기, 시, 미리 캠퍼스(PPT) 등 모든 것을 그림으로 표현해야 한다. 글씨와 그림까지 선생님과 반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으니 아이의 학교생활은 창의력과 자신감으로 꽉 채워진다. 정말 그림만 그려 주었다. 꽃을 그리고 색을 입히고 같이 꽃 이름을 읊으며 그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엄마, 그림이 최고야
엄마가 해주는 밥이 최고가 아니라 그림이 최고라는 말에 졸리고 지치지만 손가락에 힘을 주고 눈에 레이저를 쏘며 그려본다.
또 다른 책을 소개하고 싶다. 학교에서 포켓몬이 인기이다. 아이와 포켓몬 속의 그림을 똑같이 따라 그린다. 그때부터 꽃과 나무를 그리며 다져진 나의 실력이 나오기 시작한다. 포켓몬의 다양한 몸짓을 스르륵 그린다. 아이와 종이에 한 장씩 그려서 바늘과 실을 이용해 다섯장을 모두 엮어서 책으로 만든다. 곱게 만든 포켓몬 책을 한 아름 가져다가 친구들에게 색칠 하라고 나눠준다. 아이는 반에서 인기쟁이가 된다. 엄마가 연필로 그려준 그림이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는 최고 인기이다.
내가 그린 그림은 인기가 많으니 주문이 들어온다. 쉴 새 없이 그리고 또 그린다. 어느새 따라 그리기 천재가 된다. 그림만 그려줬을 뿐인데 아이의 미술 실력과 학교생활까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그림을 잘 그리니 상을 받는다. 각종 대회에 나가 상을 쓸어온다. 상장, 도서상품권이 집을 가득 매운다.
아이가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 마음은 모두 같다. 핸드폰의 영상으로 아이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기지 말고 다양한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한 순간을 함께 하자. 무엇이든 함께하면 정이 들고 그것은 곧 실력이 된다.
그림으로 아이가 잘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