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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디짱 Mar 20. 2022

빼앗긴 산책로에도 봄은 오는가

아기와의 하루는 길다. 무조건 나가야 한다. 유모차를 끌만 한 산책로가 지척에 있다. 왕복 2키로 정도 될까. 중앙엔 실개천이 흐르고 양쪽엔 데크가 있다. 중간중간 벤치도 많고 1미터 간격으로 나무도 빼곡히 심겨 있다. 데크 입구엔 모모스 원두를 쓰는 맛있는 커피집도 있다. 그런데도 워낙 촌 동네라 사람이 없다. 이 시국에 딱 맞는 코스다. 오늘도 나갔고, 그러다 보았다. ‘3월27일부터 여좌천 양방향 차량 통제’.      


여좌천이라고 하면 모르지만 로망스 다리라고 하면 안다. 로망스 다리도 모른다면 진해라고 하면 안다. 온 천지 가로수가 벚꽃인 이곳. 봄이 되면 마음까지 분홍분홍해지는 곳. 길거리에 장범준 벚꽃엔딩이 무한 반복되는 곳. 비라도 오는 날엔 우산 안 쓰고 꽃비 맞고 싶은 곳.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그 시절 풋풋했던 김하늘과 김재원이 사랑을 속삭이던 다리. 여의도 벚꽃 구경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그야말로 벚꽃 대잔치. 그 로망스 다리가 바로 우리 집 앞, 나와 아기의 산책로다.


하지만 진해 거주민의 봄은 어찌 그리 잔인했던가. 초딩때 아빠가 온 가족을 이끌고 찾은 군항제에서도 차 밀린 기억밖에 없는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봄만 되면 진해는 모든 게 품절 혹은 마비다. 5분이면 끝날 퇴근길이 1시간이 넘어가면 진짜 울고 싶다. 차를 안 타도 거지 같은 대중교통에 밀려드는 사람들로 혼미하다. 겨우겨우 집에 오면 도둑 주차한 관광객 때문에 아파트 주차장에 자리가 없다. 밤 벚꽃을 보러 오는 사람들로 새벽까지 시끄럽다. 주말엔 나갈 수가 없어서 집에 고립된다. 스타벅스 하나 없는 이 동네가 도떼기시장처럼 들썩인다.     


한번은 나도 호젓하게 벚꽃이 보고 싶어 새벽 6시에 나간 적이 있다. 쓰레빠 질질 끌고 추리닝 차림으로 나간 로망스 다리에는 웨딩촬영 하는 신혼부부 3쌍과 단체 중국인 관광객, 뻗쳐 입고 사진 찍는 예쁜 아가씨와 그녀를 찍는 남자친구 여럿이 있었다. 봄이 그렇게도 좋냐 멍청이들아. 벚꽃이 그렇게도 이쁘디 바보들아. 십센치 노랜데, 마음속으로 부른 거 같다. 진해 사니까 벚꽃 많이 보지? 응 아냐~ 사진으로 봐~ 뉴스에서 봐~ 멀리서 보아야 예쁘다 대충 보고 가야 고맙다 벚꽃 너도 그렇다.      


차 막힌다, 사람 많다, 징징댔지만 사실은 벚꽃 볼 생각에 가장 설레는 사람이 나일지도 모른다. 그득그득 핀 벚꽃 망울이 너무 예뻐 또 똑같은 사진을 찍을지도 모른다. 아기와의 산책은 포기해야겠지만 새벽 6시가 안 되면 5시에 나올지도 모른다. 올해는 코로나 탓에 집 앞을 지나는 군악대도, 베란다서 보는 블랙 이글스도, 소떡소떡 파는 벚꽃장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봄이 온다. 벚꽃도 핀다. 내 마음도 몽글해진다.


로망스 다리의 잠자는 아기 >,< 당분간 산책은 앙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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