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나는 하루를 보낸다.

어느 전업주부의 하루

by 밝을 여름

"나는 집에서 논 적 없이 일만 하고 살아서 집에 있는 사람(전업주부)들은 집에서 뭐하나 늘 궁금했는데, 널 보니 집에서도 굉장히 바쁘구나~"


이십여 년을 일만 하신 어머님이 우리 집에서 몇 달간 살게 되면서 나에게 한 말이다.


그렇다. 나는 정말 바쁘다. 소파에 앉아서 커피 마실 여유도 없이 말이다. 그리고 전업주부는 집에서 노는 사람이 절대 아니다. 눈으로 보이고 만져지는 '돈'이라는 결과물이 없어서 그렇지, 그 어떤 직장인들보다 더 바쁘고 치열하게 하루를 보낸다.


나는 아침 7시면 하루를 시작한다.

일어나자마자 세수는 건너뛰고 주방으로 곧장 가서 그 전날 미리 해둔 국을 데우려고 가스불을 켠다. 그리고는 내 전용 대형 텀블러에 물을 왈칵왈칵 쏟아부은 뒤 쉬지 않고 단숨에 들이켠다. 평소에 물 마시는 걸 좋아하지 않고 또 이렇게 마시지 않으면 절대 스스로 찾아 마시지 않기 때문에 아침에 눈뜨면 반드시 행하는 나만의 루틴이다.


냉장고에서 밥과 밑반찬들을 꺼내 밥은 밥그릇에 옮겨 담아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밑반찬들은 행주로 가볍게 한번 쓱 닦은 식탁에 가지런히 놓는다.

밑반찬들을 눈으로 재빨리 스캔한 후 이틀 이상 식탁에 올라온 반찬이 많은 것 같으면, 미리 사뒀던 채소나 버섯들 중 마음 내키는 재료를 한 가지 골라 후다닥 새로운 요리로 변신시켜 식탁에 내놓는다.


그렇게 차려진 아침식사를 어머님과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다. 아이들 입에 한입 가득 음식을 넣어주고 곧장 일어나서 큰 아이 유치원 등원 가방에 물 가득 채운 물통과 수저통을 넣고 가방 지퍼를 닫는다. 그사이 입이 비워진 아이들 입에 또다시 음식을 채워주고 일어나서 옷장으로 가 큰아이가 입을 옷을 고르고 꺼낸다. 밥을 한번 더 떠먹이고 난 후 재빨리 큰아이 옷을 입힌다. 나와 작은아이는 집에서 입던 옷에 점퍼만 대충 걸친.


큰아이 양치까지 끝내고 나면 등원차량 올 시간이 되었다는 알람이 울린다. 알람 소리에 마음은 더 조급해져 동작은 더 빨라진다. 밖으로 나갈 준비를 끝낸 후, 두 아이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이제 막 도착한 등원차량에 큰아이를 태우고 차가 떠날 때까지 아이를 보며 연신 손을 흔들어준다.


큰아이가 탄 유치원 버스가 떠나고 나면, 작은아이와 놀이터로 향한다. 큰아이 없이 온전히 작은아이와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에 아이와 놀이터에서 신나게 논다. 그네도 타고, 시소도 타고, 미끄럼틀도 타고, 숨바꼭질도 하면서...


그렇게 한 시간 동안 놀고 나면 오전 10시가 된다.

내가 공복을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다. (난 일 년 넘게 간헐적 단식을 실천 중이다.)

집으로 돌아와선 둘째 아이 손을 씻기고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히고 아이에게 영어동요를 틀어준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장난감은 장난감 통에, 책은 책꽂이에, 어질러진 집안을 정리하고 청소기도 재빨리 돌려준다. 그리고 기름기로 얼룩진 바닥도 물걸레질해준다. 걸레는 비누 칠하고 문질러서 때가 빠질 때까지 세숫대야 한편에 밀어놓고 화장실을 나와 다용도실로 향한다. 세탁바구니 가득, 옷들을 세탁기에 확 쏟아부은 뒤 세제 넣고 세탁기 뚜껑 닫아 동작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냉장고를 열어 식구들이 전날 남긴 음식들을 데워 먹기 시작한다.

참 꿀맛이다. 16시간 공복 끝에 먹는 첫 식사라 뭘 먹어도 맛있겠지만 정말로 꿀맛이다.


그렇게 행복했던 내 식사시간을 끝내고 나면 오전 11시. 세탁이 완료된 옷가지들과 수건들을 건조기에 옮기고 동작 버튼을 누르고 난 후, 곧바로 작은아이 점심과 어머님이 드실 점심을 준비한다. 오늘 점심메뉴는 표고버섯탕수와 새우 채소볶음.


작은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새우요리가 나오자 아주 적극적으로 먹을 준비를 한다. 포크로 연신 푹푹 찔러 입안 가득 밀어놓고 오물오물 씹는다. 그런 아이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아이 점심식사가 끝나면 곧바로 설거지를 시작하고, 지저분해진 가스레인지도 깔끔하게 닦는다. 주방을 다 정리하고 식탁에 어머님 드실 식사를 세팅하고 나면 오전에 등산가셨던 어머니가 집으로 들어오신다.


이때부터 또다시 마음이 조급해진다. 어머님이 화장실로 씻으러 간 사이, 나는 얼른 아기띠로 아이를 안아 낮잠 재우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흔들어본다. 아이는 안 잘듯 버둥거리다가도 금세 잠이 들어버린다. 아이를 침대에 조용히 눕힌 뒤, 대충 겉옷 챙겨 집을 나선다. 음식물 쓰레기도 잊지 않고 챙겨 나온다.


오후 1시, 어머님이 우리 집에서 지내시는 동안 나에게 주어진 자유시간이자 혼자 운동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 후, 귀에 이어폰을 끼고 윌라 오디오북(첫 달 무료 이용 중이다.) 앱에 들어가 며칠 전부터 즐겨 듣고 있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기억 1>을 재생한다.

종종걸음으로 두 번의 횡단보도를 건너다보면 탄천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그제야 나는 숨 한번 크게 내시고는 오전 내내 바빴던 나의 모습을 뒤로한 채 자연을 만끽할 준비를 한다.


한껏 미소를 머금고 마음의 여유를 간직한 채 뭉게구름 가득 푸른 하늘을 올려다본다.

평화롭다. 평온하다. 고요하다.

나를 향해 손 흔들고 인사하듯 반겨주는 들풀과 들꽃도 바라보면서 나 역시 마음속으로 '반가워'하며 인사를 건넨다.

잔잔하면서도 고요히 흐르는 물속에는 아기자기한 귀여운 물고기 떼들이 물결 따라 움직이고, 저 멀리서 날아와 가느다란 다리로 살금살금 움직이며 물고기를 잡는 백로 모습이 신비로워 넋을 잃고 바라본다. 따뜻한 햇살 받으며 한껏 웅크린 채 깊은 잠에 빠진 오리가족을 보고 있으면 그저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그 전에는 몰랐었다. 나무가 이렇게 키가 큰지, 이름 모를 곤충들이 이렇게나 반가울 수 있는지, 눈 부신 햇살이 사람 기분을 좋게 해 주는지, 정말 몰랐다.

늘 바쁜 걸음으로 앞만 보고 걸었기 때문에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다. 아니 봤어도 어떤 감흥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세상 모든 만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라는 사실을...

살아있는 생명체든, 사물이든 상관없이 모든 것들이 소중하고 가치 있게 느껴진다.

그렇게 걸음은 빠르지만 마음만은 천천히 여유 있게 자연을 느끼고 감상한다.


두 시간여 나 혼자만의 데이트를 끝내고 나면, 나는 다시 바쁜 일상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는다. 평화롭고 고요했던 탄천 길을 벗어나, 소음 가득한 인도로 발걸음을 돌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농협 직거래장터와 저렴하게 파는 채소가게 두 군데를 번갈아 들러 가격도, 상품도 둘 다 만족스러운 음식재료들을 사서 집으로 향한다.


오후 3시 14분, 큰 아이 유치원 하원 차량이 도착할 시간에 맞춰 아파트 정류장에서 기다리면 아이가 탄 유치원 버스가 정류장에 멈춘다. 차에서 내린 아이와 함께 선생님께 배꼽인사를 한 뒤, 서둘러 집으로 올라온다.


집으로 오자마자 큰아이는 화장실로, 나는 주방으로 곧장 가서 아이들에게 먹일 과일들로 간식을 준비한다. 아이들이 과일을 먹는 동안 큰아이 유치원 가방에 들어있던 수저통과 물통을 꺼내 깨끗이 씻어 식기 건조대에 올려놓는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돌려 다용도실 세탁건조기에서 옷가지들을 꺼내 거실로 들고 가서 하나씩 하나씩 개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과일접시를 다 비운 큰아이가 배고프다며 칭얼 대기 시작한다.

다 개어진 옷가지들과 수건들을 제자리에 갖다 놓은 후 나는 부랴부랴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다시 주방으로 향한다.


오후 5시. 오늘 저녁식사메뉴는 계란찜과 오이무침, 그리고 새송이버섯볶음이다. 맛있다며 연신 "아~아~"거리는 아이들 입이 제비 새끼 입 마냥 귀엽다. 엄마 음식이 제일 맛있다며 엄지손가락까지 치켜세우는 큰아이 모습에 요리할 맛 나고 뿌듯해지기까지 한다. 다행히 가리는 음식 하나 없이 다 잘 먹어주는 아이들이라 저녁식사시간은 늘 평화롭다. 밥 한 톨 남김없이 밥그릇을 싹 비우고 나면 어느샌가 내 휴대폰 진동소리가 들린다. 남편이 퇴근한다는 전화다.


저녁 6시 30분, 남편과의 짧은 통화를 마치고 서둘러 남편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남편 저녁식사메뉴는 점심때 어머님께 해드렸던 표고버섯탕수.

점심때와 마찬가지로 전분가루와 물 섞은 반죽을 휘리릭 저어 재빨리 튀김옷을 입혀 노릇노릇 앞뒤로 구워준다. 튀김 반죽이 바삭바삭해지면 건져 키친타월에 기름기 한번 빼 주고 프라이팬에 양파, 파프리카, 다진 마늘 넣어 센 불에 재빠르게 볶은 뒤 미리 만들어둔 양념소스를 쏴악 부어 센 불에 끓인다. 전분물 세 숟가락으로 소스 농도를 맞추고 노릇노릇 구워진 표고버섯을 섞어 후다닥 볶아준다.

요리 끝난 시간에 맞춰 도착한 남편은 손만 씻고 옷만 대충 갈아입고는 식사를 시작한다.


저녁 7시, 남편이 저녁 먹을 동안 나는 두 아이와 씻을 준비를 한다. 화장실 욕조를 씻고 따뜻한 물을 받 아이 한 명씩 씻겨 욕조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나면 내가 씻을 차례다. 아이들 양치까지 다 끝내고 나면 목욕시간이 끝난다. 수건으로 아이들 머리와 몸을 닦이고 화장품을 얼굴에 바르게 한다. 내복으로 갈아입히고 나서야 나도 옷을 갈아 입고 머리를 말린다.


남편 식사까지 끝나고 나면 오늘의 마지막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를 끝으로 오늘 집안일이 끝이 났다. 그렇게 집안일을 다 끝내고 나면 아이들과 팽이 종이접기를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가 원하는 걸 얘기하면 내가 대신 만드는 거다. 몇 번 아이들과 종이접기를 하다 보면 금세 아이들 잘 시간이 된다.


밤 8시 50분, 책 한 권 꺼내 아이들과 안방으로 가서 읽어준다. 밤 9시가 되면 우리 집 모든 불들은 꺼진다. 불 끄고 3초면 잠이 드는 큰아이와 달리 작은아이는 안 자려고 이리저리 뒤척이고 여기저기 왔다 갔다 돌아다닌다. 그 모습에 지쳐 대부분 내가 먼저 잠이 들지만, 어쩌다 작은아이가 나보다 먼저 잠든 날은 슬그머니 거실로 나와 온전히 나만을 위한 두 번째 시간을 가진다.


밤 10시~새벽 2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다.

책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이따금씩 아이가 잠에서 깨 나를 찾을 때면 어쩔 수 없이 책 읽기를 중단하고 침대로 돌아가지만, 이내 아이가 다시 잠든 걸 확인하면 책 읽기를 포기하는 대신, 머리 끝까지 이불 뒤집어쓰고 휴대폰을 켜서 글을 쓴다. 그러다 보면 시간은 훌쩍 흘러 새벽 2시. 엄마가 안자는 걸 느꼈는지, 아니면 자면서도 휴대폰의 옅은 불빛이 거슬렸는지, 작은 아이가 칭얼대며 울기 시작한다.

난 어쩔 수 없이 글을 쓰다 만채 휴대폰을 끄고 잠을 청한다.


그렇게 나는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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