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개킨 옷을 방에 들고 가서 정리하고 있는데 아들이 내게로 와 오만 원 한 장을 쑥 내민다. 그러면서 코를 훌쩍이는 데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다.
난 대충 무슨 상황인지는 알 것 같지만 애써 모른척하며 아들에게 묻는다.
"아들~ 울었어?"
"응. 할머니도 울었어."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거실 소파에 앉아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는데,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그 몇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할머니가 한 달에 한번 나한테 돈 주기로 해서 준거야."
아들은 내가 묻지 않았는데도 굳이 부연설명까지 해준다.
잘은 모르겠지만, 평소 손주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어머님이 이사 가기 전날이라 마음이 센티해져 아끼는 손주한테 용돈이라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내일이면 어머님과의 동거도 끝이 난다.
어머님은 우리 집에서의 3개월 간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내일 우리 집 근처 새집으로 이사 가신다.
나에게는 석 달이 마치 1년같이 느껴질 정도로 길게 느껴졌었다. 주변에 만나는 사람도 없고 늘 항상 집에만 계시는 어머님이라, 각자 운동하는 시간 빼고는 항상 같은 공간에 있었다. 삼시 세끼까지는 못하더라도 하루에 두 끼는 항상 새로운 음식으로 차려드렸고, 어머님의 잔소리에도 말대답 한번 하지 않았고, 어머님이 시키는 일은 고분고분하게 다했다. 나로서는 꼭 마치 대형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래서 내일이 되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것 같은데, 이 집에서 어머님의 이사를 반가워하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아 괜히 씁쓸해졌다. 나도 아들처럼, 어머님처럼 울어야 맞는 건가? 눈물을 쥐어짜도 눈물 한 방울도 안 나오는 내가 이상한 건가? 나만 나쁜 사람인가?
내 아들과 어머님의 관계는 좀 특별하다.
다른 집 사정은 내가 모르니 어떻다 말할 수 없지만, 언니네, 그리고 주변 지인들과 비교해 보면 조금은 다른 것 같다.
난 손주가 없어서 그 감정을 전혀 알 길이 없지만, 어머님은 손주를 그냥 예뻐하는 게 아니라, 아주 심각하게 예뻐하는 것 같다.
아들이 어머님 머리카락을 뜯어도 허허허.
6살임에도 초등학교 3학년과 신체조건이 같은 아들이 가녀린 어머님의 등을 밟고 어깨를 짓눌러도 허허허.
어머님 손을 잡아당기고 밀쳐도 허허허.
이렇게 맨날 웃으시기만 한다.
위의 글만 보면 우리 아들이 티브이에 나오는 문제아 같아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6살 나이답지 않게 점잖고 의젓한 스타일이라 어머님과 있을 때의 저런 행동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처음 몇 번은 나도 주의를 줬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님은 괜찮다고만 하고 아들은 혼을 내는 나를 원망했다.
하루는 아들에게 물어봤다. 왜 유독 할머니한테만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아들 하는 말이 '할머니가 좋아해서. 그렇게 하면 할머니가 웃으니까'였다.
그 이후로 나는 '둘'사이의 일에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 집에서 같이 살기 전에는 자주 봐도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라 손주가 심한 장난을 쳐도 다 받아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연 매일 같이 보는 사이에서도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 이번 기회에 나 나름대로는 한번 지켜보기로 했다.
어머님이 우리 집에 오신 첫날, 아들은 할머니랑 같이 살게 되어 너무 좋다고 하면서 항상 늘 그렇듯 어머님을 향해 돌진했다. 남자아이라 기운도 세고 에너지도 넘치니 마치 큰 대형견이 달려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어머님 어깨에 올라타고, 안아달라, 업어달라 끊임없이 요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어머님도 지쳤을 것 같아 '도와드리기 위해' 아들에게 한마디 내던졌다.
"오늘 참 별나네. 보는 내가 다 기 빨린다."
곧바로 풀이 죽은 아들의 모습에 어머님은 나를 향해 묘한 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하셨다.
"얘~ 너 행복한 거야. 이럴 때가 좋은 거야."
아... '둘'사이의 일에 개입하지 않기로 했었지?
내가 왜 그랬을까...
다른 날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 나 쉬했으니까 물 대신 내려줘요!"
"(주방에 있는 나를 두고 방에 있는 할머니한테) 할머니! 나 우유 좀 줘!"
"할머니! 엄마가 나 혼냈어."
아들은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것처럼 무슨 일이 생기면, 아니 아무 일 없어도 항상 할머니를 불렀고 어머님은 항상 달려와서 아들이 원하는 대로 다 해줬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속이 부글부글거릴 때가 많았지만, 며칠 지나면 어머님도 두 손 두 발 다 드시겠지 하며 묵묵히 지켜봤다.
그런데 석 달이 지나 내일이면 이사 가는 오늘까지도 어머님은 손주에게만큼은 늘 변함없이 '허허허' 하신다.
참 대단한 것 같다.
내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인데도 그런 버르장머리 없는 모습 보면 화가 나는데, 어머님은 단 한 번도 버럭 하신 적이 없으니 내 판단이 틀렸다.
인정하기로 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그렇게 나는 오늘만큼은 어머님께 내 아들을 양보하기로 했다. 어머님과 아들, 둘 만의 시간을 주기 위해 일부러 딸이랑 둘이서만 길게 목욕하고 또 목욕하고 나와서는 평소에 안 하던 드라이기까지 사용해서 머리도 말렸다. 머리 말리고 방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느릿느릿 줍고 있는데 거실에서 어머님과 장난감 가지고 놀고 있던 아들의 목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