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남을 의심하지 말자.

일상의 깨달음

by 밝을 여름


"아빠! 어제 문 쾅 닫아서 엄마한테 혼났지? 왜 그랬어? 얼른 빨리 가서 사과해! "


우리 집 6살 '작은 거인' 아들이 남편에게 한 말이다. 그리고 아들은 나에게 쪼르르 와서는 작은 목소리로 얘기한다.


"엄마! 아빠가 어제 문 쾅 닫은 건 실수였대. 알겠지?"


'아... 그런 거였구나. 내가 오해한 거였구나.'

아들 얘기를 듣고 나니, 남편에게 미안해졌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전날 밤, 아이들을 재우러 다 같이 방에 들어가려는데 남편은 해야 될 일이 있다며 아이들에게 먼저 자라고 했다.

아이들은 아빠랑 같이 자고 싶다고 계속 떼를 썼지만, 남편은 일 때문에 안된다며 아이들을 방으로 돌려보냈다.


불을 끄고 자리를 잡고 누우니, 우리 집 첫째는 바로 잠에 곯아떨어졌고, 나는 둘째만 잠들기 기다렸다.

아이가 잠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나도 슬슬 지겨워지고 있을 그때였다. 아이는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방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불빛에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는 "아빠~아빠~"하며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는 몇 번을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급기야 잠투정까지 섞여 더 큰소리로 아빠를 부르며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아이를 안아주고 타일러봐도 소용없었다. 그 순간 아이에게는 내가 아니라 아빠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이가 그렇게까지 하면 잠깐 들어와서 자는 시늉이라고 하면 좋으련만 남편은 요지부동이었다.


나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사실 난 알고 있었다. 일은 핑계라는 걸...

남편은 요즘 들어 부쩍 잘 안 자려고 하는 작은아이 때문에 아이를 재울 때마다 힘들어했고, '일'은 자신이 아이를 안 재울 수 있는 자기만의 방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 괘씸했다.

나는 우는 아이를 두고 거실로 나와 식탁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는 남편에게 짜증 섞인 말투로 얘기했다.


"애가 저 정도로 울면 좀 들어와 주면 안 되나?"


하고 싶은 말은 더 많았지만, 다른 방에 계시는 어머님 때문에 참았다.


남편은 아무 말 없었지만, 신경질 난 얼굴로 내 뒤를 따라 방에 들어왔다.

그때였다.

갑자기 방 문짝이 떨어져 나갈 듯이 쾅하고 닫히는 거였다.

그러면서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아이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눕는 것이었다.


난 그 순간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지금 나랑 한판 붙자는 건가?'

'어머님이 계시는데 이러는 건 나를 무시하는 행동이 아닌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면서 어머님이 있든 없든, 아이들이 자든 안자든, 그 순간에는 나도 너무 신경질이 나서 남편에게 마구 쏘아붙이고 말았다.


"뭐 하자는 건데?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자기가 뭐 대단한 줄 아나? 진짜 꼴 보기 싫다!"


남편은 나의 막말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몇 분뒤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참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 천하태평하게 잠을 잘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오늘 잠은 다 잔 것 같은데 드르렁드르렁 코까지 골며 자고 있는 남편이 꼬집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울다 지쳐 잠든 작은아이 옆에서, 나는 눈만 끔벅인 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방문을 쾅하고 닫은 남편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생각하면 할수록 분했다. 생각이 많아지니 혼자서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되었다.


'이 인간이랑 계속 살아야 되나?'


남편에 대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무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문 쾅하고 닫은 거 말고는 잘못한 게 없었다. 남편의 단점, 싫은 점, 나쁜 점에 대해 생각하려니 없었다. 생각이 안 났다.




남편과 나는 각각 20살, 21살에 만났다. 11년을 연애하고 결혼했다. 11년 연애기간 중, 7년은 장거리 연애였다.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는 단 한 번의 헤어짐도 없었고, 남편은 늘 한결같고 변함없는 모습을 내게 보여줬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남편을 대한민국 1%의 남자라고 자주 얘기했었다. 그 정도로 남편은 나에게 깊은 신뢰감을 줬고 나만 바라봤고 나만 생각해줬다.

내가 짜증을 내도, 일방적으로 화를 내고 전화를 받지 않아도 단 한 번도 나에게 짜증을 낸 적이 없었다. 모두 다 본인 잘못이라며 먼저 사과했었다.


철없던 20대 초반, '엽기적인 그녀'라는 영화가 대히트 쳤던 그 당시, 이상하게도 엽기적인 그녀 속 전지현처럼 따라 하는 여자들이 주변에 많았다. 나 또한 군중심리(?)때문이랄까? 그냥 그때는 전지현처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함부로 할 때가 많았다. 그런 나의 막무가내의 모습도 다 받아줬던 남편이었다.


본인 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으면서 나 몰래 지갑에 5만 원 넣어주기도 하고, 아르바이트하다가 어묵 하나 사 먹고 싶어도 그 돈 아끼고 아껴 커플링 사서 직접 내가 사는 부산까지 와 이벤트까지 해주던 남편이었다.


장거리 연애 탓에 1년에 많이 만나봤자 10번도 안되지만, 그래도 전국 여기저기 다 가봤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데이트 코스도 알아서 척척 준비하던 남편이었다.


또 얼마 전에는 아빠의 수술비가 많이 나와서 걱정하며 얘기를 꺼내니, 혼자였으면 어쩔 뻔했냐고, 형제가 많으니 나눠서 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오히려 나를 다독여주던 남편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남편에 대한 미움은커녕 고마움만 더 커졌다.

못한 것보다는 잘한 게 훨씬 많았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을 맞이하고, 나는 괜한 자존심 때문에 일부러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편은 항상 늘 그렇듯, 나에게 먼저 다가와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전날 밤에 자신도 조금 짜증이 나기는 했지만 일부러 문을 쾅 닫은 건 아니라고... 실수였다고...




나보다 22cm는 더 크고, 몸무게는 35kg 더 나가지만, 18년째 나에게 혼나기만 하는 남편,

예전보다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한 나의 성질머리를 무한대로 받아주고 있는 남편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가득 담아 정성스러운 한 끼 식사 차려줘야겠다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깨달음의 길은 한없이 멀고 멀다는 걸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 되도록 마음공부, 마음 수양에 더 집중해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해본다.


미리 남을 의심하지 말자. 오해하지 말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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