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장 위험 관리를 위한 도구 및 기술
커버사진은 Dream.AI라는 그림 그려주는 AI를 사용하여 Digitl safety management라는 프롬프트를 사용하여 생성한 사진이다.
"디지털 시대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디지털 시민으로 생각하고 디지털 도구를 사용하여 우리의 삶을 더 쉽고 효율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 브라이언 솔리스
1532년 11월 16일,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168명의 스페인 군대는 남아메리카의 카하마르카에서 8만 명의 잉카 군과 맞선다. 그리고 순식간에 스페인군은 잉카 원주민 7000여 명을 학살하고 그들의 황제 아타우알파를 생포한다. 건국 90년 된 제국의 싹을 싹둑 잘라버리게 되는 스페인과 잉카의 첫 충돌, 1000만 인구를 거느린 잉카는 정말 168명밖에 안 되는 소수의 스페인군에 의해 멸망을 했다.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잉카는 정말 저항조차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부족이었을까?
스페인 사람들이 잉카로 간 까닭은 순전히 황금 때문이다. 잉카의 불운은 그들이 갖고 있던 황금과 은이 우연히도 16세기 유럽의 통화 단위와 똑같았다는 데 있었다. 당시 선원들의 1년 평균 임금은 금 2분의 1파운드였다. 바다에서 20년 동안 뼈 빠지게 고생하면 금 10파운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신세계 정복 전쟁인 카하마르카 전투에 참여했던 기병이 금 90파운드와 은 180파운드를 하사 받았다. 일반 선원의 180년 치 봉급이었다. 그들에게 ‘정복’이란 모험의 문제가 아니라 일확천금을 벌 수 있는 인생역전의 ‘대박 사업’이었다. 사람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하고, 문명을 파괴하는 그들은 무기를 손에 든 기업가였다.
구두 수선공, 재단사, 선원, 대장장이, 목수, 상인 등 당시 스페인의 낮은 신분계층에 속했던 사람들에게 잉카 원정은 로또나 다름없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프란시스코 피사로(1478∼1541)다. 기마대 대위였던 아버지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하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피사로는 장남이었지만 공식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아버지의 소유지도 물려받지 못했다. 출생의 상처와 아버지 집에서 살고 싶었던 무의식적 욕망은 그의 발걸음을 필연적으로 신대륙으로 향하게 했다.
탐험가로부터 잉카 제국 이야기를 들은 피사로는 1532년 11월 15일 168명을 이끌고 카하마르카에 도착했다. 다음날 피사로는 대군을 배후에 남겨둔 채 5000명 만을 데리고 피사로와의 회견을 위해 찾아온 아타우알파 황제를 포로로 잡은 채 그의 군대를 전멸시켰다. 스페인군은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고, 30분 만에 끝났으니 싸움이라고 하기보다는 대량 학살이었다. 아타우알파한테 몸값으로 방 한가득 황금을 받은 피사로는 황금만 챙긴 뒤 2∼3개월 뒤에 그를 처형했다. 이듬해 11월 피사로는 한 번의 대접전도 없이 잉카의 수도 쿠스코에 무혈입성했다.
장장 4000km가 넘는 대륙에 10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졌던 잉카가 허무하게 몰락한 이유를 네 가지 부재 때문으로 설명한다.
첫 번째, 남미에는 불행히도 소와 말 같은 유럽에는 흔한 가축이 없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가축과 생활해 온 유럽인들은 동물성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이 있었으나 신대륙 사람들은 그게 없어 유럽인들이 들여온 새로운 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는 것.
두 번째는 강철과 총의 부재다. 잉카에는 금광과 은광만 넘쳤을 뿐 무기로 쓸 철을 캐낼 만한 철광이 드물었다. 잉카 전사들이 아무리 용맹해도 구석기 수준의 돌 무기만으로 총칼로 무장한 유럽인들의 화기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세 번째, 잉카인들에게는 문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키푸’라는 밧줄과 끈의 매듭으로 소규모 정보를 기록하는 게 전부였다. 따라서 잉카인들은 스페인의 멕시코·카리브해 연안 점령 등 국경선 너머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정보량 부족과 소통 부재는 우물 안 개구리 신세와 같았다.
네 번째는 중앙집권 체제가 채 갖춰지지 않았고, 갑작스레 대제국을 건설한 잉카족의 폭정에 시달리며 조공을 바치던 수많은 부족들이 스페인 군대에 협력, 반잉카의 선봉에 선 점이다.
종합해 보면 잉카 제국의 몰락은 정보 부족과 소통부재에 따른 우물 안 개구리였고, 직접적으로 싸울 수 있는 강철과 총과 같은 적절한 도구의 사용이 없었다.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말이 있다. 살다 보면 항상 세상은 반복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구세대가 경험한 실수와 성공의 사실들을 신세대들은 똑같이 답습한다. 아무리 구세대가 자신의 경험담을 신세대들에게 알려주어도. 그들은 실제로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그 경험들을 애 서 무시하거나 모르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되는데 이를 항상 예측하지 못하는 우리는 얼마나 경험에서 배울 줄 모르는 존재인가.
1980년~2000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를 우리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라고 말한다. 이들은 디지털 기술과 함께 자라 디지털 기술을 익숙하게 사용하고 능숙하게 사용하는 세대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컴퓨터, 스마트폰, 인터넷이 이미 어디에나 있는 세상에서 태어나 평생 동안 이러한 기술에 접근하면서 성장하였다. MZ세대 이전과 이후의 Gap차이의 중심에는 디지털 도구의 사용이 있다. 모든 생활이 디지털화가 되어 있는 MZ세대는 그 이전 세대보다 다양한 정보를 습득하여 이를 활용하고 창의적으로 접근을 한다.
그렇다고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디지털을 무조건적으로 배워야 된다고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코로나 발생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디지털 도구 사용의 필요성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코로나 이후 많은 조직들이 디지털 기술을 모든 비즈니스 영역에 통합시켜 고객 서비스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적용하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검토하고 실행하고 있다.
1000만 명이 넘는 잉카제국이 200명도 안 되는 스페인 군대에 점령당한 이유가 도구의 사용에 있다. 현시대에 잉카제국의 아타우알파 황제가 되지 않으려면 내 모든 생활과 일을 디지털화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게 바로 퍼스널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다.
*출처: 2010년 1월 8일 자 뉴스 세계일보 '잉카제국은 왜 허망하게 무너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