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할 수 없는 섹스와 사랑에 대해
중학교 3학년 때 즈음이었을까, 어른들의 포옹 장면을 보고 심장이 턱 막혔던 적이 있었다. 당시 내 머릿속에는 "왜 저 두 사람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저렇게 행복해할까?"라는 막연한 궁금증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답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런데 '왜' 보다 '어떻게'가 더 복잡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럼에도 이상적인 사랑과 섹스는 항상 충돌하는 존재다. 사랑과 솔직함, 성적 욕망과 도덕, 정절과 자유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봄의 정점에 태어난 게 분명하다.
흩날리는 벚꽃보다 시선을 붙드는 건 그녀의 외모였다. 투명한 복숭아빛 피부 위로 따듯한 햇살이 내려앉아, 얼굴 전체가 자연광을 머금은 조명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큰 눈동자에는 촉촉한 이슬이 어려 있었고, 그 속에는 무언가를 오래 지켜본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깊이가 담겨 있었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시간이 살짝 멈춘 듯했다. 시간여행자가 어딘가에 있을거라 믿는 이유도 이때문이겠지.
연한 핑크빛 입술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여러 감정을 전해주었다.
그녀는 침묵 속에서도 문장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고, 조용한 한 줄은 마치 속삭이듯 귓가를 맴돌았다.
자연스러운 웨이브가 내려앉은 긴 머리는 조심스럽게 묶여 있엇지만 완벽하게는 아니었다. 느슨하게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릿결이 그녀의 뺨과 목선을 간질이며 바람과 함께 가벼운 농담을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입은 플로럴 미니 원피스는 연보라색 꽃잎이 흩뿌려진 듯한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봄의 교과서 표지에 가까운 느낌. 만약 봄이 사람을 골라 한 명만 대표로 뽑을 수 있다면, 그 옷을 입은 그녀가 당선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여기에는 투표도 경선도 필요 없다. 그냥 자동 당선.
허리선이 살짝 올라간 A라인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고문고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걷는 길엔 이미 꽃이 피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꽃들이 박수를 쳤을 것이다. 마치 "얘들아 저정도면 우리가 퇴근해도 될 거 같은데? 같은 분위기랄까.
그녀는 풍경 속 한 요소가 아니라 풍경이 그녀 주위를 감싸야만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봄바람과는 인사조차 안 하는 사이처럼 냉랭하다.
꽃잎은 한가롭게 흩날리고 있었찌만, 그녀의 눈빛은 냉동실에 잘못 넣어둔 채소보다 차가웠다.
얼굴빛은 여전히 고왔지만 그 아름다움은 스팀기 터지기 직전의 압력밥솥 같은 느낌.
물론 예쁘긴 한데, 확실히 터지기 직전.
그리고 그 터지는 대상이 나일 가능성은 98.7% 정도.
"야.. 너는 그거 할 생각 밖에 없냐?"
그녀는 빠른 속도로 걸으며, 고개를 돌려 나를 경멸하듯 쏘아보았다.
그 순간 라일락빛 가디건 자락이 바람에 휘날렸고, 묶은 머리 뒤로 나풀거리던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마치 바람조차 그녀에게 쳐맞고 튕겨나가는 것 같은 느낌.
"아니. 그런게 아니고..."
나는 무언가를 해명하려 했지만, 찐따답게, 말이 입에서 반쯤 나오자마자 공중에서 녹아버렸다.
"그런데 왜 계속 숙소 이야기만 하는거야?"
그녀의 말 한 마디를 감정의 밀도로 따지자면, 광어 200마리 정도는 회 뜰 수 있을 정도의 날카로움이었다. 무엇보다 감정의 질감이 살아 있었다. 덕분에 나는 상처를 입었다고 느끼기도 전에 자존심의 일부가 얇게 썰려 접시에 얹혀 진 듯한 느낌.
"그래야, 우리 이동 동선을 최적화 할 수 있으니까."
내 말이 끝나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잠깐 멈췄다.
그 정적은, 꼭 누가 ‘이럴 줄 알았다’고 말없이 중얼대는 느낌.
눈빛은 더 복잡했다.
실망, 짜증, 서운함. 이 세 가지 감정은 마치 '니가 먼저 나가라!" 라고 외치며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가운데 낀 주말 알바생처럼 곤란한 표정으로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 이 분위기는 사랑을 나누는 게 아닌, 해지 위약금이 무려 8,161,942원인 계약서를 몰래 받아든 사람의 표정에 가까울 것이다.
"아니, 그걸 꼭 해야 해?"
"그런게 아니고, 너랑 더 깊은 대화를 하고 싶어서 그렇지."
"여기서도 할 수 있잖아?"
"여기서도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그런데 깊은 대화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해야 하니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그 짧은 숨소리는 봄바람이 아닌, 냉동실 문을 열었을 때 갑자기 튀어나오는 찬 김에 가까웠다. 맞은 것도 아닌데, 혼난 기분.
"넌 그런 생각밖에 없잖아."
"물론 그것도 포함이지만 아니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너와 솔직한 모습으로 대화하는 게 난 제일 재미있어."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 눈빛은 단순한 째려봄이 아니었다. 마치 법정 드라마의 마지막 증언 장면처럼, 내 지난 모든 말과 행동이 지금 이 순간, 눈빛 하나로 낱낱이 분해되고 검증되고 있었다. 그녀의 뇌 속 어딘가에서 거짓말탐지기가 붉은 경고음을 울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기분.
"솔직히 말해. 너 이럴려고 만나는거지? 진짜 완전 변태 같아.."
그 말은 날카롭기도 했지만, 어딘가 정답을 이미 알고 있으니 틀리면 감점 처리하겠다는 선생님의 어투에 가까웠다. 나는 선생님 상황극은 딱히 안 땡기는데;;
"변태는 맞아. 그런데 그것만 하려고 너를 만나는 건 아니야. 그랬으면 싸구려 모텔 잡지, 왜 예쁜 방을 찾아보려고 하겠어? 나는 너랑 더 아늑한 곳에서 진심을 담은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이야. 우리가 식당을 고를 때도 아무 데나 가는 거 아니잖아. 공간도 다르지 않아. 너와 내가 함께 머무는 순간을 더 아름답게 만들고 싶을 뿐이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말을 잘랐다.
"그러면 왜 계속 숙소 이야기만 하는건데?"
"그래야 예약을 하고, 그 근처 맛집을 검색하지.."
그 순간, 그녀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건 꼭, 누군가 손에 든 냉커피를 보며 ‘저건 좀 마시고 싶네?’고 생각하는 찰나의 망설임처럼 보였다.
정확히 0.7초쯤 감정의 틈이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다. 활화산은 어느새 잠잠해져, 봄바람처럼 가벼워졌다. 그리고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완벽하게 관리된 무표정이 자리를 되찾았다.
이제야 겨우 내 진심이 전달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다층적인 구조인지, 좀 알아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지금도 억울했다. 진짜 억울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가? 그냥 조용하고 아늑한 곳에서 대화하자고 했고, 진심을 말했고, 예의도 차렸고, 꽃길도 같이 걸으며 사진도 찍어줬다.
이 감정, 이 묘한 억울함과 억눌림은 도대체 어디다 풀어야 할까?
일단 침대에서 다 풀어야겠다.
섹스와 이상적인 사랑이 충돌할 때
사랑이란 무엇일까? 솔직하게 접근하자면 인간이 발명한 가장 고상한 착각 중 하나다. 사랑.. 물론 멋진 개념이다. 포옹과 눈빛, 향기, 저녁노을 아래에서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든 순간을 사랑이라 말한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감정이 실제 현실에 발을 들이는 순간 너무 많은 이상과 규범, 교훈, 낭만적 기풍들이 뒤엉키게 되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샐러드가 될 때가 있다.
어느 커플이 서로를 마치 오랫동안 잃어버린 반쪽처럼 바라보고 있었는데, 5분 정도 뒤에 고성으로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유는 "너는 왜 음식을 먹을 때 쩝쩝거리냐" 였던 것이었다. 이처럼 사랑의 지속시간은 식사 시간보다 짧게 느껴질 때가 많다.
사랑을 이야기할 때면 솔직함이라는 놈이 끼어든다. 사랑하는 관계라면 솔직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솔직함이 어느 순간 "네 친구 졸라 섹시하더라.. ㄷㄷ" 로 연결된다면? 물론 이게 진실이고 팩트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진실과 솔직함이 항상 해피엔딩을 약속하는 건 아니다. 부모님의 크리스마스 선물, 첫 연인의 헤어짐 이유, 그리고 섹스할 때 "아까 어땠어?" 같은 질문의 답까지. 인간은 다양한 형태의 진실을 통해 불행을 겪으며 성장한다.
솔직함이 끼어들고 나서는 성적 욕망도 뒤따라 온다. 여기서는 도덕의 영역까지 함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는 마치 상반신은 철학 교수인데, 하반신은 술에 취한 대학생의 존재와 유사하다. 상체는 "이게 옳은 일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지만 하체는 이미 바제와 팬티가 벗겨져 있는 상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갈등에 놓인 자신을 괴상한 존재로 취급한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모순을 비정상으로 여기는 문화다. 실제로 성적 욕망과 도덕이 충돌하는 순간, 대부분의 도덕은 '지금은 생각하지 말고 나중에 반성해라.'는 느슨한 방향으로 자신을 조정하려 한다. 이처럼 도덕이란 인간을 자동으로 조정시키는 소프트웨어에 가깝다.
추가로 정절과 자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둘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수 없지만 항상 충돌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절이란 상대에게만 눈길을 주고, 마음을 주고, 오직 한 사람만을 바라보겠다는 맹세에 가깝다. 특히 수많은 문화 콘텐츠가 그려낸 로맨스와 함께 약간의 중세 수도원적인 규율이 동반된다. 물론 듣기엔 좋다. 아름답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그리 단순했다면 광고회사들은 과감한 노출 전략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마음껏 욕망하고 새로운 자극에 이끌리는 것이다. 가끔은 아무 의미 없이 누군가와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 '아 나 아직은 괜찮은 놈인 것 같기도?" 같은 위안을 얻는다. 이 자유는 '내가 이걸 왜 원하지?"라는 질문과 동행하기도 한다. 고로 자유는 동시에 불안하다. 그래서 자유를 누릴 권리를 주장하면서도 은근히 그 자유가 주는 불편함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어떻게 되느냐? 매 순간 사랑하고 싶고, 솔직해지고 싶지만, 상처는 주기 싫고, 욕망은 숨기기 어렵고, 정절을 지키고 싶지만 약간을 바람도 피워보고 싶고, 그러면서 자책하지 않길 바라는 존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이 딜레마에 대해 누군가는 간결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그냥 한 사람만 사랑하고 그 사람에게만 욕망을 털어놓고 정절을 지키면서 자유롭게 살아라."
그런데 위 말을 한 누군가는 유니콘을 타고 출근하고, 청룡을 타고 퇴근하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유니콘과 청룡은 현실에 없다. 인간은 원래 바보 같고, 불완전하고, 끊임없이 욕망과 도덕 사이에서 줄넘기를 하는 존재다. 물론 이 줄넘기를 멈추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핵심은 넘어지더라도 계속 줄을 넘는 일을 배우는 것이다. 사랑과 솔직함, 성적 욕망과 도덕, 정절과 자유는 서로를 소모시키는 장애물이 아니라, 나 자신을 더 우아하게 만들기도 하고 추잡스럽게 만드는 삶의 파트너라고 보면 된다.
완벽한 사랑과 섹스는 곧 신화
한때는 결혼이라는 제도 내에서만 섹스할 수 있다는 비교적 단단한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 어쩌면 그 시절의 섹스는 종교적 예식이라 해도 무방하다. 거룩하면서도 조심스럽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금고 안에서 철저하게 봉인해야 했던 행위다. 마치 하늘이 맺어준 사이에서만 할 수 있는, 신의 승인 도장이 찍혀야만 할 수 있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전통은 완화되었다. 와이파이 신호보다 덜 견고해졌다고 볼 수 있다. 현실은 결혼이라는 테두리 내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기도 한다. 이는 타락해서 그런 게 아니다. 애초에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엉뚱한 곳으로 시선을 보내도록 진화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여기서 문제는 그 욕망이 시선으로만 멈추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여기에는 상상과 죄책감, 윤리와 충동 그리고 자유와 정절이라는 충동이 함께 따라오게 된다.
굳이 예를 들자면,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끌리네?", "욕망은 있는데, 이걸 말하면 상처받겠지?" 같은 생각들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거지?"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하려면 자유롭고 정직한 성적 자기표현의 영역으로 넘어가야 한다.
물론 이 지점에서 갑자기 자유를 외치면, 사회는 우아하게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며 째려볼 것이다. 마치 "이 새키 또 이상한 소리 하고 자빠졌네."라는 표정으로. 그 반응은 아주 익숙하다. 종종 자유를 외치면 '무책임함', '방종'을 떠올리고, 욕망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감정과 감성은 사라진 느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욕망이 가장 안전해지는 순간은 그것이 숨김없이 표현될 수 있을 때다. 솔직한 대화가 허락된 공간에서의 욕망은 억압의 감옥 속에서 무장한 괴물로 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취향과 경계, 감정의 방향을 알고 그것을 아름답고 차분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괴물이 아닌 견고한 친밀감과 신뢰로 피어난다.
예를 들어, "이건 너에게만 솔직해지고 싶어서 하는 건데."라는 짧은 문장은 듣는 사람에게 일종의 정서적 안심을 심어준다. 이 한 줄이 오해로 인한 갈등이나 섣부른 방어 반응을 줄여주는 안전벨트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욕망은 숨길수록 삐딱하게 흐르고, 드러낼수록 더 다정해질 수 있다. 문제는 그걸 이야기할 용기보다 듣고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어쩌면 이 공간이야 말로 진짜 성숙한 관계가 숨 쉬는 장소가 아닐까.
물론 이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은 크게 세 가지다.
"지금 이랬다가는, 이 사회에서 쫓겨나겠지?"라는 근원적인 두려움,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 욕망을 말하면 관계가 끝나겠지?"와 같은 자기 검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애초에 이상한 놈은 아닐까? 하는 자기혐오다.
이 세 감정은 마치 어릴 적에 몰래 본 성교육 책자처럼 어디선가 은밀하게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가 기회를 틈타 따라온다. 문제는 우리가 이를 감추려 하다 보면, 오히려 그 감정들이 더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데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솔직하게 다가가면, 대부분의 인간이 이러한 감정의 지도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 대부분은 비슷한 감정 속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며, '나만 이상한가?' 같은 자책을 공통적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완벽한 섹스와 사랑부터 내려놓아야 진짜 친밀감이 생긴다
완벽한 섹스와 사랑을 이야기할 때면 호텔 뷔페가 떠오른다. 광고에서는 바닷가재와 캐비어가 넘쳐나고, 조명이 샴페인 색으로 반짝이며, 모든 음식이 금방 만들어진 것처럼 완벽해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새우는 미지근하고, 스테이크는 질기고, 옆 테이블 아이는 접시에 젤리만 수북이 쌓아놓은 채 부모님과 싸우고 있다.
섹스도 다르지 않다. 잡지나 영화 또는 입소문이라는 이름의 신화들 속에서 사랑과 섹스는 늘 환상적이고 대단한 무엇이라 배운다. 10분 동안 호흡이 멈추고, 그 후엔 서로의 이름도 잊어버릴 만큼 격렬한 황홀경에 빠지는 그런 류의 것이 대표적이겠다. 하지만 정작 현실은 어떤가 하면, 몸이 삐끗하거나,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나거나, 리모컨이 허리를 찌른다거나, 갑자기 개가 침대 위로 뛰어오른다거나 하는 온갖 변수로 가득하다.
사실 완벽한 섹스라는 건 애초에 존재한 적도 존재할 필요도 없다. 섹스는 뷔페보다 덜 정돈되어 있는 것이며, 더 많은 불확실성과 대책 없는 상황들이 동반한다. 중요한 것은 그 엉성함 속에서 함께 있는 사람과 어떤 방식으로 친밀감을 쌓아가느냐다. 불이 꺼진 방 안에서 "네가 아까 발로 내 옆구리 찼어."라고 웃는 순간이야 말로 어쩌면 진짜 친밀감이 시작되는 시점일 지도 모른다.
고로 섹스를 할 때 지향할 수 있는 것은 완벽을 목표로 달려가는 게 아니라, 조금 덜 불편해지고 조금 더 편하게 말할 수 있고, 조금 더 답게 숨 쉬는 방식을 향해야 한다. "나 이거 할 줄 몰라."라고 말할 수 있는 솔직함, "나 이거 해보고 싶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너랑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라는 상호긍정이다.
솔직함, 용기, 상호긍정. 이 세 가지만 조화를 잘 이룬다면, 평소에는 부끄러워했을 문제가 "그럼 같이 고민해 보자."라는 말 한마디로 무장해제되고, 서로가 품고 있던 작은 불안들도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라는 생각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다. 사실 인간은 늘 엉성한 방식으로 진정한 친밀감을 만들어냅니다. 인간은 결코 유려하지도 기술적으로도 완벽하지 않지만, 그 엉성함이야 말로 서로를 더 잘 껴안을 수 있게 만드는 완충제 같은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마치며
인간은 늘 엉성한 방식으로 친밀감을 만들어낸다. 누군가의 다리를 깔고 앉아버려서 웃음이 터진다거나, 키스를 하려다 머리를 부딪히는 순간들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완벽하지 않은 사건들이 마음을 느슨하게 하고, 긴장을 풀어준다.
인간 관계는 완벽하고 유려한 대사나 눈부신 조명, 완벽한 각도의 턱선으로 친밀해지는 것이 아니다. 초콜릿을 입가에 묻은 줄도 모르고 이야기하다가 서로를 빤히 바라보게 될 때, 엉망인 타이밍에 동시에 고백을 꺼내놓고 민망하게 웃을 때, 이러한 어긋남에서 진짜 가까워지는 일이 발생한다. 어쩌면 진정한 친밀감이란 뒤죽박죽으로 조립된 이케아 가구와 같아, 나사 하나가 남거나 다리가 삐그덕 거려도 결국엔 둘이 앉아서 웃다가 마무리짓는 경험에서 피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성숙한 사회의 기틀이 되기도 한다.
서로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실수에 조금 더 너그러워지고 자신의 부족함에도 덜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데이트 도중 긴장한 나머지 계속 물을 엎지른다 해도, 그 모습을 귀엽다고 웃으며 받아줄 수 있는 사회라면, 완벽하지 않은 사람도 사랑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피어난다. 반대로 모든 관계가 철저히 정답만 말해야 하고, 틀리면 끝이라는 규칙 속에서 작동한다면 누구도 본심을 드러내지 못하고 감정의 지하실에 숨어버리게 된ㄷ .
욕망을 말할 수 있는 언어를 허락하고, 불만을 털어놓을 공간이 열려 있을 때에야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감추지 않은 채 관계 속에서 건강하게 살아 숨쉴 수 있다. 요리를 완벽하게 해내는 것보다 계란 하나를 태워먹고 "이거 한 번 먹어볼래?" 라고 농담조로 말했을 때, 상대가 "나 이번에 암보험 가입했는데 잘 됐다." 라고 웃어주는 순간과 비슷하다. 결국 이 짧은 대화 안에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도 되는 존재'라는 확인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이는 곧 겉으로 멀쩡하고 속은 비어 있는 사회가 아니라, 엉성하지만 정직하고, 불완전하지만 단단한 관계들로 구성된 사회다. 말하자면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삐딱하지만 절대 흔들리지 않고 편안한 의자랄까. 때로는 다리가 살짞 흔들려도 앉는 데는 문제가 없는, 오히려 그런 의자가 사람을 더 편안하게 느끼게 하듯이. 우리는 그런 사회 안에서 비로소 친밀감을 배우고, 상처를 견디며,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사랑도 섹스도 사회도 완벽해서 좋은 게 아니라, 엉성함을 함께 견디고 나누었을 때에야 비로소 조금씩 괜찮아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서로의 민낯을 조금 더 부드럽게 바라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시작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다. 아주 사소한 공감에서 출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잠시나마 완벽한 사랑과 섹스라는 환상을 내려놓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관계 맺으려 노력할 때, 그때 비로소 친밀감이 자라고 그 위에 건강한 사회가 천천히 그리고 단단하게 자리 싹틀지도 모른다.
아! 운동하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