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괄호안 숫자는 나남출판사 최용철 역의 숫자입니다.
오늘날 사람을 크게 둘로 구분할 수 있다. MCU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MCU,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점차 커져 이제 한마디로 간단히 요약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어찌나 복잡한지 옆에서 이야기를 들으면 정신이 멍해지는 듯하다.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고 소비하며 즐기는 것. 이것이 어찌 비단 오늘의 일일까. 오래전 중국의 문학도 각자 그 세계를 구성하고 이를 뒤섞어 새로운 실험을 진행하곤 했다. <삼국지>도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고, <서유기>도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다. 흔히 <삼국지>, <서유기>하면 이어서 으레 <수호지>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여기에 <홍루몽>을 덧붙여 '4대명저'로 꼽는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삼국지>나 <서유기> 정도일 테지만 중국 문학에서는 <홍루몽>을 으뜸으로 치기도 한다.
<홍루몽>을 읽어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취추바이의 유서 끄트머리를 읽으면서였다.
"자! 이제 어설픈 연기는 결말에 이르렀다. 무대는 텅 비어버렸다. 이제 떠나기 싫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길고 긴 휴식이다. 내 몸이 어떻게 처리되든지 더 이상 알 바 없다. 안녕!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여!
고리키의 <클림 삼긴의 생애>, 투르게네프의 <루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루쉰의 <아Q정전>, 마오둔의 <동요>, 차오쉐친의 <홍루몽> - 이 책들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중국 두부는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다. 안녕, 영원히 안녕!" : <천안문>, 조너선 스펜스, 이산. 337쪽.
취추바이는 중국 혁명을 꿈꾸던 공산당 엘리트였다. 그가 국민당에 체포당해 죽기 전 남긴 글은 적잖은 울림을 남긴다. 그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했던 <홍루몽>은 대관절 어떤 책일까. 더불어 중국의 붉은 별, 마오쩌둥도 <홍루몽>을 칭찬했다던데.
막상 책을 펼치니 어지럽다. 어찌나 많은 사람이 나오는지. 가씨네 대저택 안에 벌어지는 인물들의 관계며 사건사고를 보자니 낯선 세계에 휑하니 홀로 버려진 것만 같다.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아 제대로 구분도 안 되나, 무책임한 핑계가 솟아나기도 한다. 읽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뭐. 한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그리 친절하지 않은 건 어쩌면 당연하다.
<홍루몽>은 석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여와가 돌로 하늘을 땜질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남았단다. 두 선인이 이 돌을 옥으로 바꿔 인간 세상에 내려보냈고, 그가 통령보옥 즉 가보옥이다. 신령한 돌이 인간 세상을 경험한 이야기가 <홍루몽>이다. 다른 이름으로 <석두기>, <정승록>, <풍월보감>, <금릉십이차> 등등이 있으나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이름은 <홍루몽>이다.
이렇게 <홍루몽>은 저자 조설근의 입을 빌어 이 글이 전래된 이야기를 들려주며 시작한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 글을 그리 힘들이지 말고 보라는 대목.
"다만 바라건대 그들이 원 없이 술 마시고 배불리 누웠을 때나, 번거로운 일을 피해 근심 걱정을 떨치려고 이 책을 한번 열어보면 소중한 수명을 아끼고 쓸데없이 힘쓰는 일일 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하면 허망한 세상사를 궁리하고 쫓아가느라 고생하는 것보다야 구설수를 막고 다리품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30)
이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진사은이라는 인물을 처음으로 등장시킨다. 그에게 영련이라는 딸이 있는데 그만 그를 잃어버리고 만다. 한편 그는 가우촌이라는 선비와 교류하고 있었다. 가우촌은 과거를 보러 상경하고, 진사은은 화재로 빈털터리가 된다. 진사은은 도사를 따라 속세를 떠나 사라지고, 훗날 가우촌이 진사은의 부인을 찾아 사례한다는 내용으로 1회가 끝난다. 허나 이는 모두 쓸모없는 이야기. 왜냐하면 정작 주무대와는 영 동떨어져있기 때문.
다만 1회에 등장하는 도사들은 이후 전개될 이야기가 어떠한지를 슬쩍 알려주고 있다. 진사은은 꿈속에서 도사를 만나 '태허환경太虛幻境'에 도달하여 양쪽 기둥에서 다음의 대련을 읽는다.
"가짜가 진짜 되면 진짜 또한 가짜요, 假作眞時眞亦假
무가 유가 되면 유 또한 무가 된다. 無爲有處有遷無"
이 글은 <홍루몽>이 철저히 지어낸 이야기이며, 그러나 하나의 중요한 실상을 전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홍루몽>이 왕조와 연대도 없으며 훌륭한 인물의 품성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는 지적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이 역시 사람들의 이야기. 난잡한 사람들이지만 그 역시 욕망을 품은 인간 군상 가운데 하나. 꿈(夢)과 환영(幻) 같지만 이 역시 하나의 실상.
가우촌은 관직을 잃고 떠돌다 임여해라는 사람의 집에서 그의 달 '임대옥'을 가르친다. 이후 가우촌과 임대옥이 금릉(난징)으로 올라가 영국부에 머물면서 본격적으로 가씨네 집안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에 앞서 2회에서는 냉자홍의 말을 통해 금릉의 가씨네 집, 녕국부과 영국부의 상황이 소개된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여자아이란 말은 지극히 존귀하고 청정한 존재이니 저 아미타불이나 원시천존보다도 더 존귀하기 그지없어."(64)라고 말하는 인물. 그의 기행에 아비가 매질을 했으나 매를 맞으면서도 '누나, 누이'를 소리치며 찾았다는 그 인물. 바로 옥을 입에 물고 태어났다는 가보옥의 이야기이다.
인간이 된 돌, 통령보옥 가보옥의 이야기가 상세하게 펼쳐지면 좋으련만, 가씨네 집안을 속속들이 보여주겠다는 속셈인지 저자 조설근은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소개한다. 특히 여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하는 바람에 가씨네뿐만 아니라 왕씨, 설씨 등등의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설씨는 가우촌이 부임하여 판결한 살인 사건을 계기로 등장한다. 헌데 흥미롭게도 그 살인 사건이 얽힌 인물 가운데 하나가 1회 진사은이 잃어버린 딸 영련이었다. 이렇게 <홍루몽>은 인물과 인물을 이어 또 다른 이야기를 보여준다. 가우촌의 판결로 또 또 다른 인물, 바로 설반과 설보차 남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둘도 가씨네 집안에 들어가 다른 이들과 뒤섞여 <홍루몽>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가 된다.
5회에서는 가보옥이 꿈속에서 <홍루몽> 열두 곡을 듣는다. 열 두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시로 미리 소개하는 내용이라는데 시는 열두 편이 넘고 당연히 엮인 인물도 열둘보다 많다.. 내용은 복잡하니 각 인물의 이름만 적어보자. 청문(보옥의 시녀), 화습인(보옥의 시녀), 진영련(진사은의 딸, 설반의 첩), 설보차와 임대옥, 원춘, 탐춘, 사상운, 묘옥, 영춘, 석춘, 왕희봉, 교저, 이환, 진가경.
가보옥은 이 <홍루몽> 꿈을 진가경의 방에서 꾸는데, 그는 "가경아, 날 좀 살려줘!"(143)라며 꿈에서 깨어난다. 진가경은 자신의 이름을 아는 가보옥을 기이하게 여기지만 더 묘한 것은 가보옥이 그 꿈을 꾸고 몽정을 하고 말았다는 것. 가보옥이 몽정한 것을 습인이 알고, 이 둘은 각별한 사이가 된다.
7회에는 진종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9회에서 가보옥과 함께 서당의 소동을 일으킨 원인이기도 하다. 헌데 놀랍게도 서당은 글공부하는 곳이지만 남몰래 남색을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당의 인물 가운데는 '향련'과 '옥애'와 같은 여성스러운 이름도 있었다. 진종과 향련이 남몰래 잠깐 만나려는데 김영이라는 인물에게 발각되고 만다. 김영은 이 둘의 만남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 서당의 학동들에게 이렇게 일러바친다. "방금 저 둘이 뒤뜰에서 서로 입술을 맞대고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는 걸 똑똑히 보았단 말이야."(220)
뒤에 이어지는 더 뜨거운(!) 내용은 생략하도록 하자. 이렇게 <홍루몽>은 가상의 집안 가씨네 대저택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성씨 '가賈'는 거짓이라는 뜻의 '가假'와 음이 같다는 점을 기억하자. 따라서 이는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도 거짓의. 그러나 거짓은 진실을 드러내기 마련. 금릉의 중심부에서 벌어지는 이들의 이야기는 저 대저택 속에 사는 인물들도 똑같은 욕정을 가진 인간군상이라는 점을 까발려 보여준다. 이 이야기를 읽고 당대의 독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편 이글이 조선에서 널리 읽히지 못했던 이유도 쉬이 알듯하다.
* 10월 10일 우리실험자들 세미나에서 나눈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