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의 위엄> 上
임대옥과 설보차 가운데 누가 좋나요? <홍루몽> 세미나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유치한 질문에 모두 빵 터지고 말았지만 어느새 조금은 몰두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긴 둘은 서로 참 다르지.
누구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은 유치하기도 하지만 꽤 매력적이기도 하다. 개인의 취향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자체를 드러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순한 질문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다. 유비가 좋으냐 조조가 좋으냐? <삼국지>에서. 유방이 좋으냐 항우가 좋으냐 <초한지>에서.
책을 사둔 것은 하마 몇달은 되었을 것이다. <초한지>를 해석한 SF 작품이라는 소식에 단박에 구매했다. 그러나 책장속에 그냥 처박혀 있었다. 한 달 전엔가 심심한 차에 꺼내 읽었는데 그리 몰두하지 못했다. 찔끔씩 읽기만 했다.
"꽤 오래 읽네요? 금방 읽을 거 같은데." 아이가 신기한 듯 묻는다. 그 질문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절반이 넘어 좀 이야기가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단숨에 상권 절반을 읽었다.
<제왕의 위엄>은 상술한 대로 초한지의 내용을 새롭게 각색한 소설이다. 다라제도의 여러 나라는 최초의 황제 마피데레의 손에 정복되고 각기 다른 배경에서 새 시대를 꿈꾸는 쿠니 가루와 마타 진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처음에는 이름도 낯설고 배경도 낯설어 읽기 힘들었다. 그러나 읽으면서 역사속의 인물과 맞춰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예를 들어 메피데레를 암살하려던 루안은 꾀주머니 장량을 닮았다. 그가 늙은 노인을 만나 책을 전수받는 이야기까지 그대로 살렸다.
유방과 항우, 소하와 장량, 팽월과 영포도 나온듯 하다. 아직 하권을 읽지 않았으니 곧 한신도 나오지 않을지. 한편 홍문연의 자리는 어떻게 처리할지도 궁금하다. 아쉬움이 있다면 항우가 파부침주하고 거록성을 깨뜨리는 장면이 빠졌다는 점.
하나씩 인물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지만 서로 다른 둘, 유방과 항우를 각각 민들레와 국화로 빗대어 표현하는 것도 흥미롭다. 오상고절이라는 말도 있듯, 국화는 절개와 떳떳함을 상징하는 꽃이다. 항우의 높은 기개와 어울린다 하겠다.
그렇다면 유방은? 작가는 그를 민들레에 빗대었다. 그래서 <민들레 왕조 연대기 1>라는 이름도 붙였다. 아마도 민들레 왕조 연대기 2에서는 광무제를, 3에서는 후한말기의 혼란상을 다루지 않을지. 여튼 그는 민들레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민들레는 지는 법이 없어. 정원사가 잔디밭에서 다 뽑아내고 드디어 해치웠구나 할 때쯤 비가 내리면, 조그맣고 노란 꽃이 다시 고개를 들지. 그러면서도 절대로 거만 떠는 법이 없어. 색깔도 향기도 다른 꽃을 압도하지 않으니까. 무서울 정도로 실용적이라서 잎은 맛있는 먹거리 겸 약으로 쓰이는가 하면, 뿌리는 단단한 땅을 무르게 해서 연약한 다른 꽃들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개척자 노릇까지 해. 하지만 민들레가 최고로 멋진 이유는, 흙에 뿌리를 박고 살면서도 하늘을 꿈꾸는 꽃이라는 거야. 꽃씨가 바람에 올라타면 민들레는 사람이 공들여 가꾼 장미나 울금향이나 만수국보다 훨씬 더 멀리 날아가서, 훨씬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어."(353-354)
<항우본기>를 읽으면서 만인지적 항우가 멋있었다. 오강을 건너 강동으로 넘어가지 않고 떳떳하게 죽음을 맞는 모습이 좋았다. 그러나 <고조본기>의 유방은 너무 초라했다. 능구렁이에다 무책임한 모습까지.
몇번이나 읽었을까. 어느날 유방의 집요함이 묵직하게 마음에 남았다. 패하고 패해도 굴하지 않는 그 정신이 부러웠고, 항우에게 맞서다 가슴에 쇠뇌를 맞고도 '저놈이 내 발을 맞혔구나'하는 말주변이 부러웠다. 왕을 봉해달라는 한신의 바람을 듣고 쌍욕을 하다가도, 장량에게 발을 밟히자 바로 싸나이라면 진짜 왕을 해야지 하며 눙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무섭도록 실용적인 인간. 그러면서도 끝까지 낭만을 잃지 않았던 철부지. <제왕의 위엄>을 다시 읽으며 유방을 다시 생각하고 있다. 꼿꼿함만이 좋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으며. 어쩌면 나이가 들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항우와도 같은 힘, 기개, 재능을 바라던 날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으니 유방이라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어쨌든 이렇게 이야기는 힘이 있다. 수천 년전 천하를 뒤흔든 무뢰배 이야기에 흠뻑 빠져버렸으니 말이다. 슬픈 것은 이야기의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것. 결국 민들레가 국화를 이기겠지. 그럼에도 항우와 유방, 유방과 항우. 이 둘의 팽팽한 긴장을 어떻게 끌고 갈지 궁금하다.
참, 임대옥과 설보차 가운데 나는 임대옥의 손을 들어주었다. 지금은 그렇지만 또 모르는 일이다. 시간이 흐르면 설보차가 좋아질지도. 항우와 유방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