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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멀티 태스킹

by 기픈옹달
원천징수도 지결을 따로 작성해야 하나요?

요즘은 세상이 좋아서 MacOS로도 대부분의 은행업무가 가능하다. 물론 은행마다 자기 보안 프로그램을 깔아야 한다며 귀찮게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정말 많이 나아졌다. 공인인증서를 받기 위해서는 보안 프로그램을 깔아야 하고, 보안 프로그램을 깔다 재부팅을 해야 하고, 재부팅을 하고 나니 개인인증을 해야 하고, 개인인증을 위해 또 보안 프로그램을 깔고 재부팅하고 하는 식의 무간지옥에 빠졌던 과거를 생각하면 천지개벽이라 할만하다.


최근 가장 놀라는 것은 홈택스의 발전이다. MacOS에서 크롬이나 사파리로도 모두 이용 가능하다! 게다가 대부분 업무를 처리하는데 꽤 쾌적하다. 세금을 떼어가는 곳이니 그만큼 변화가 발 빠른 게 아닐까 싶다. 놀랍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정부 사이트의 경우 참혹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홈페이지를 한번 이용하러 사이트에 들어갔다가는 무간지옥에 빠져 허우적대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오늘도 'e나라도움'에 들어가 한참을 헤매다 왔다. 마을 사업 주책임자가 되어 사업을 관리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국비를 받아 쓰는 거라 'e나라도움'을 이용해야 한단다. 역시나 정부 사이트답게 MacOS에서는 접속이 불가능하다. 가장 좋은 건 IE,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쓰는 거다. 회원가입을 하면 그만인 여느 사이트와 달리, 회원가입을 하고 본인인증을 하고, 본인 등록을 하고... 여간 복잡한 게 아니다.


게다가 통상적으로 마을사업에 통용되던 비목 세목 구분이 달라 새로 계산해야 하기도 했다. 사업목적, 사업방향 등을 입력하고, 보조금 예산 항목을 정리하고 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제 대충 보면 어디가 문제인지, 어떤 식으로 서류를 처리해야 하는지 보인다는 것. 뭣이 중요하고 뭣을 대충 써도 되는지도 어느 정도는 알겠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원천징수, 그러니까 강사비 등 인건비 명목으로 누군가에게 돈을 지급할 때 세금을 떼는 것을 두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했더랬다. 홈택스에 들어가는 것부터 힘들었고, 원천징수 비율을 계산하는 것도 어지러웠다. 요즘 기준으로는 8.8%, 그러니까 곱셈 수준의 간단한 계산인데도 머릿속은 영 헝클어져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실수도 하고, 몇 번 경험을 하다 보니 이제는 원천징수쯤이야 뚝딱 해결하곤 한다. 사업비를 처리할 때 쓰는 지결(지출결의서)도 척척 써내곤 한다. 사업비의 비목과 세목을 구분하는 법, 예산 기획하는 법도 대충 몸에 익었다.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게 맞는 말이겠다. 이곳저곳에서 사업비를 받아 처리하다 보니, 여기저기가 어떻게 다르게 돌아가는 지도 대충은 보인다. 더불어 국가에서 만든 사이트가 가장 엉망이라는 진리까지도 습득!


올해 오면서 서울시 공고를 들어가 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어떤 사업들이 있는지를 보고, 가능한 모든 공모에 지원해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사업계획서도 쓰면서 늘더라. 사람들과 나누던 이야기,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를 사업계획서에 녹여내는 일을 몇 달간 하다 보니 요령도 생겼다. 사업방향과 내용을 잡되, 구체적인 내용을 사업내용을 구성하기 전에 예산부터 짤 것.


오늘은 아침부터 여러 사업으로 바빴다. 오전에는 실무자 교육을 받았고, 오후에는 통장 개설을 위해 은행을 찾았다. 참, 우리는 협동조합 법인이라 통장 하나 만들려면 생각보다 필요한 서류가 많다. 사업마다 통장을 개설하고 카드도 만들어야 하니 은행에서 잡아먹는 시간도 꽤 된다.


통장 개설이 끝나자 주무관을 만타 협약서에 동장을 찍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중간조직의 실무담당자들과 행정공무원들의 태도는 영 다르다. 한쪽이 열과 성의를 다하는 편이라면, 다른 한쪽은 일단 도장을 찍고 문제가 생기게 하지는 맙시다 하는 식.


그렇게 은행과 구청을 돌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e나라도움 사이트와 씨름을 했다. 매뉴얼을 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실무 담당자와 통화하면서 겨우 처리했는데, 그래도 내가 가장 빠른 편이란다. 다른 사람들은 이 복잡한 것을 어떻게 할지. 이럴 때면 대부분의 마을 사업이니 하는 것이 공무원이 해야 할 일을 주민에게 떠넘기는 건 아닌가 하는 질문이 든다.


집에 돌아와 쓰러졌다. 각기 다른 사업에 이리저리 불려 다니느라 지쳤던 까닭이다. 그런데도 꿈속에서도 비목과 세목이 맞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고, 세목별 금액이 빈다며 이를 어떻게 처리할까를 두고 고민했다. 잠깐 눈을 붙였는데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오늘 아침 비를 맞으며 집을 나서는 길에 문득 후회가 들었다. 이제 잘하는 일만 하자고 했는데. 이렇게 문서를 처리하고 이런저런 사업에 기웃기웃하는 건 내가 잘하는 게 아닌데 말이다. 책 읽고 글쓰고 하는 게 내가 잘하는 일 아니었을까.


글쓰고 강의하면서 밥벌이하고 싶은데 그런 길은 요원하다. 실력이건, 능력이건, 재능이건 여튼 전업 연구자로서의 삶은 실패했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이런저런 일을 벌이며 살아남겠다고 아둥바둥하는 거라 치자. 한편으로는 하다가 못하면 때려치지 하는 생각도 든다. 해도 해도 못하는 일이 있는 법이니까.


그냥 책상에 앉아 본격적인 '사무'를 시작하기 전, 몇 자라도 적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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