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의 북소리 중원을 울리다 4
실제로 묵돌 선우 당시 한나라의 장수 가운데 흉노에 투항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이는 한나라 조정이 토사구팽으로 몸살을 앓았기 때문이고, 한편 흉노의 무력이 한나라를 압도했던 까닭이다. 한왕韓王 신信은 그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일찍이 유방은 중원을 통일한 이후 흉노와 맞섰다. 그러나 참패하고 만다. 백등산에서 포위되어 꼼짝없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연지, 즉 선우의 아내에게 후한 선물을 보내 활로를 모색한다. 연지의 건의에 따라 묵돌은 포위망 한쪽을 풀어주었고 유방은 이 틈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유방 사후 여태후가 권력을 잡자 묵돌은 아래와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단다.
나는 쓸쓸하고 외로운 군주라오. 나는 물가 태어나 소와 말을 키우는 초원에서 자랐소. 수 차례 국경 근처에 가보았는데 중원에 가서 한번 구경하며 놀았으면 한다오. 폐하도 혼자가 되었으니 쓸쓸하고 외롭게 혼자서 지내겠지요. 우리 둘 모두 홀몸이 된 군주로서 즐겁지도 않고, 즐길 것도 없소. 그러니 우리 두 사람이 서로 바꿔봅시다. 서로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각자가 없는 것으로 바꾸어보면 어떻겠소?
흉노의 선우도 홀몸이고, 한나라의 태후도 홀몸이니 서로 함께 어울리자는 말. 이 말을 듣고 여태후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화를 내며 당장 군사를 일으켜 흉노와 일전을 벌이려 했지만 주변의 신하들이 모두 말렸다. 백등산의 참패를 기억해야 한다며.
그렇다고 흉노와 한의 관계가 늘 적대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즉위 후 흉노와 화친을 맺고 교류를 한다. <흉노열전>에는 묵돌 선우와 문제가 주고받은 서신이 남아있다. 내용을 보면 흥미롭다. 한나라의 서신은 "황제는 삼가 흉노의 대선우께 묻노니 무탈하십니까"라고 시작한다. 반면 흉노의 서신은 "하늘이 세운 흉노의 대선우는 황제께 삼가 묻노니 무탈하십니까"라고 시작한다. 스스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 셈.
한나라는 흉노에게 공주를 보내기도 했다. 이때 환관 중항렬이 억지로 흉노로 건너가야 했다. 그는 이후 흉노의 편에 서서 한나라를 상대한다. 한나라가 선우에게 서신을 보낼 때엔 한 자 한 치 크기였는데, 선우는 일부러 한 자 두 치 크기의 목판을 이용했다. 뿐만 아니라 봉인도 한나라의 것보다 크고 질게 했으며 문구도 더 담대한 표현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이런 식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을 세워주신 흉노의 대선우는 한나라 황제께 삼가 묻노니 무탈하십니까. 보내는 물품은 이러저러합니다.
앞서 보았듯 중항렬은 흉노의 독특한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나아가 그는 한나라와의 교역이 흉노의 정체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흉노 사람들은 한나라의 비단과 옷감을 좋아했는데 이를 두고 중항렬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흉노의 인구는 한나라의 군 하나에도 못 미칩니다. 그런데도 강한 것은 먹고 입는 것이 한나라와 다른 까닭입니다. 지금 선우께서 풍속을 바꿔 한나라의 것을 좋아한다면 흉노의 백성은 머지않아 모두 한나라에 귀속될 것입니다. 한나라의 비단과 옷감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말을 타고 풀이나 가시덤불을 달려보십시오. 모두 찢어져 못 쓰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백성들에게 한나라의 옷이 털옷이나 가죽옷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보이십시오. 한나라의 먹거리를 얻으면 모두 버리고 그것이 젖과 유제품보다 편리하지도 않고 맛도 좋지 않다는 사실을 보이십시오."
후대의 역사는 중항렬의 경고가 쓸데없는 것이 아님을 증거한다. 한때 몽골족의 원과 여진족의 청이 한때 중원을 지배했으나 중원의 문화에 동화되고 말았다. 한때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던 이들의 기세도 예전 같을 수 없었다. 날카로움을 잃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부의 분란 때문일까. 묵돌 선우 사후 흉노는 이전과 같은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
도리어 무제는 과감하게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기도 했다. 사막을 건너 흉노의 본거지를 직접 공격한다. 이때 활약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 이장군 이광이 있었다. 그들은 수십만의 군대를 이끌고 사막을 가로지른다. 기록에 따르면 위청과 곽거병에게 딸린 기병이 5만이었으니 도합 10만 이상의 기병이 전장에 나갔다. 게다가 물자 등을 실어 나르는 말이 14만 필이라고 했으니 그 규모는 엄청났을 것이다.
위청 등은 큰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승리 뒤에 따르는 상처도 만만치 않았는데, 뒤따르는 말 14만필 가운데 3만필도 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토록 큰 희생을 치렀지만 흉노는 끝까지 정복되지 못했다. 그러나 흉노에 입힌 타격도 만만치 않았다.
이때 크게 활약한 인물이 표기장군 곽거병이었다. 그는 외삼촌 위청을 따라 전장에 나선다. 그가 처음 장수로 흉노와 싸운 것은 18살이었다. 24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연전연승! 대장군 위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너무 이른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만다.
지금도 중국 시안에 가면 거대한 그의 무덤을 볼 수 있다. 그의 무덤은 흉노가 숭상하는 기련산를 본떠 만들었다 한다. 흉노가 신성시 여기는 기련산 부근까지 점령한 공로를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 그의 무덤 앞에 있는 석상이 당시의 역전된 상황을 보여준다. 마답흉노馬踏匈奴라는 이름의 이 석상은 말발굽 아래 흉노가 짓밟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말을 타고 중원을 호령했던 흉노가 이번에는 한나라 기병 아래 짓밟히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흉노 정벌에 참여한 장수 가운데는 이광의 손자 이릉도 있었다. 그는 흉노족 정벌 도중 포로가 되었다. 그를 변호하다 사마천이 궁형을 받은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릉이 흉노와 맞서 싸울 때에는 앞에서 언급한 대규모 원정에 참여했던 주요 인물, 위청이나 곽거병이 모두 세상을 떠난 이후였다. 흉노와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들의 땅을 모두 복속시킬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성과를 거두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무제는 흉노뿐만 아니라 사방 이민족을 모두 상대했다. 교역을 하기도 했고 복속시키기도 했으며, 군사력으로 제압하기도 했다. 무제가 사방 이민족에게 눈을 돌린 것은 단순히 권력욕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천자로서 문명세계를 이끌어 가야 할 의무도 갖고 있었다.
한무제는 이민족의 땅을 점령하여 군郡을 만들기도 했지만 단순히 번신으로 삼아 조공의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는 이후 중국이 주변국을 상대하는 대표적인 방식이었다. 군을 세워 점령했던 지역의 상당 부분은 이후 중국의 실제 영토가 되었고, 조공 관계를 맺었던 이들은 중화 문명의 변두리를 차지했다. 흉노의 땅을 복속시키지도 못했고, 흉노는 번신으로 몸을 굽히지도 않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울타를 세워 경계를 긋는 수밖에 없었다.
앞의 것이 문화적, 외교적 방식이라면 뒤의 것은 군사적, 영토적 방식이라 하겠다. 어디에 주목하느냐에 따라 중국의 경계는 서로 달라진다. 이후 중국의 역사는 이 두 경계를 서로 조절하는 과정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