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유란, 철학의 시민권을 취하라

'중국'이라는 문제 - 루쉰과 펑유란의 모색 #3

by 기픈옹달
우리실험자들http://experimentor.net/ 열린강좌 내용을 나눕니다.
총 4부분으로 나눌 예정입니다.

#1 중국을 사유하기 :: https://brunch.co.kr/@zziraci/70
#2 루쉰,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자 :: https://brunch.co.kr/@zziraci/73
#3 펑유란, 철학의 시민권을 취하라 :: https://brunch.co.kr/@zziraci/74
#4 중국의 부상과 ‘중국’의 부활 :: https://brunch.co.kr/@zziraci/75



루쉰에 비해 펑유란은 꽤 오래 살았다. 1894년에 태어나 1990년에 세상을 떠났다. 청조 말, 몰락의 시대에 태어나 신중국의 변화를 보며 눈을 감았다. 루쉰과 비교할 때 그는 보다 근대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여기에는 그의 스승인 후스의 역할이 크다.


1919년 5.4 운동의 불꽃이 ‘중국’에 타올랐다. 이는 문화운동인 동시에 민족운동이었다. 새로운 민족의 모습은 어때야 하는가. 이것이 당대의 질문 가운데 하나였다. 1920년대에는 이 문제를 이어, 북경대를 새롭게 개혁했다. 비록 ‘대학’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북경대학은 University가 아니라 太學이었다. 근대 학문을 배우고 가르치는 곳이라기보다는 미래의 관료를 키우는 교육 기관이었다. 그러나 낡은 왕조가 쓰러져 가는 가운데 ‘미래의 관료’가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근대 학문의 공간으로 북경대가 새롭게 개혁되었다. 이에 후스는 철학과 교수가 되었다. 그는 앞서 미국에서 존 듀이에게 수학한 인물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펑유란은 북경대 철학과에 입학하여 그의 스승 후스처럼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도 존 듀이의 제자였다. ‘중국’의 몰락은 묵직한 질문을 던져 주었다. 그 가운데는 덕德선생과 새塞선생의 부재에 대한 문제의식도 자리 잡았다. 이는 각각 중국에 민주(democracy)와 과학(science)이 없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의 과제는 근대 학문의 체계를 따라 중국의 사상을 새롭게 정리하는 것이었다. 펑유란의 <중국철학사>는 그 작업의 결과물이다. 여기서 그는 중국에서 철학이라 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솎아내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다. 이는 펑유란 당대에 중국에 철학이 있는가, 이것이 의문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아직까지도 이 문제는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철학이라는 학문의 세계에서 과연 중국철학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 펑유란은 전통 가운데 철학의 이름표를 붙일 수 있을 만한 것을 뽑아 서술하고자 했다. 이것이 <중국철학사>의 기본적인 목표였다.


그의 시도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펑유란의 <중국철학사> 이후 중국철학(chinese philosophy)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의 저술로 인해 사람들은 중국에도 철학이라 할만한 것이 있을 뿐 아니라, ‘중국철학’이라는 말처럼 독특한 사유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펑유란은 <중국철학사>를 공자로부터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공자가 중국 최초의 학교를 만든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펑유란의 말을 빌리면 중국의 학술이라 할만한 것은 모두 공자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중국철학사>에서 공자의 위치는 소크라테스에 견줄 수 있다. 서방에 소크라테스가 있다면 여기에는 공자가 있다. 소크라테스를 서술하고 계승한 플라톤의 자리도 마련되어 있다. 펑유란은 맹자를,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순자를 견준다. 지금 보면 낯선 도식적인 이 접근은, 한편으로는 펑유란의 시대가 당면한 문제를 다른 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서양에게 우리에게도 독립적인 철학 전통이 있다는 것을 항변하고 싶었다. 당연히 그 대상은 서구인이었다. 참고로 한국에서는 <중국철학사>가 나온 지 반 세기가 다 되어서야 완역되었다. 그전까지는 그가 쓴 영역본, <A Short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가 <간명한 중국철학사>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중국철학사>가 영어로 먼저 수입되었다는 사실은 중국철학의 위치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펑유란은 철학이란 크게 세 줄기로 나뉜다고 보았다. 우주론, 인식론, 인간론. 이 가운데 우주론과 인식론은 약하나 인간론에서 두드러진 발전이 있다는 게 펑유란의 설명이다. 우주, 이 세계의 객관적인 법칙에 대해서는 연구가 부족하다. 따라서 중국에는 근대 과학이 없다. 인식, 언어와 논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약하다. 따라서 중국에는 치밀한 논증이 없다. 그러나 인간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주목할만한 성과가 있다.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국철학은 주목할 만한 데가 있다. 이 때문에 본체론本體論과 심성론心性論이라는 두 축으로 발전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송대의 유학, - 그는 이를 신유학 Neo-Confucianism이라 불렀다 - 특히 주희를 이 두 축을 종합한 인물로 소개한다. 이점에서 그는 루쉰의 작업과는 전혀 다른 작업을 수행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루쉰은 여러가지를 비판했지만 일차적으로는 전통을 아주 강하게 비판했다. 루쉰은 공자로 상징되는 유가, 전통을 그 누구보다 앞장서 비판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펑유란은 공자를 소크라테스에 견주고, 중국철학의 대표격으로 주희를 내놓고 있다.


펑유란이 말하는 중국 철학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그는 유/불/도라는 이질적인 사유가 중국 철학의 커다란 줄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셋의 위계는 동등하지 않다. 비록 뿌리는 서로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유가라는 커다란 줄기에 모두 흡수되고 말았다. 이 셋의 종합을 이룬 것 역시 송대 유학자들의 작업이었다. 종합과 발전이라는 이런 구도는 펑유란 자신이 직면한 이질적 세계에도 적용할 수 있을법하다.


그는 <중국철학사>를 크게 둘로 나누었다. <중국철학사>의 서술도 이 구분에 따라 이루어졌다. 하나는 ‘자학子學시대’로 이른바 ‘~子’들의 시대를 말한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진한 이전의 철학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철학, 이를 떼어 ‘자학시대’라 불렀다. 다른 하나는 ‘경학經學시대’로 경전을 연구하는 시대를 말한다. 한무제가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을 천명한 이래로 유가독존儒家獨存의 시대가 열렸다. 비록 한때 도가가 새롭게 부흥하기도 했고(위진시대의 신도가), 뒤이어 불가가 크게 부흥하기도 했지만(당대의 특히 선종) 여전히 학술의 근본은 유가였다고 말한다. 결국 이 둘의 철학적 성과를 포괄하여 새로운 유가가 탄생하니, 이 위대한 작업을 이룬 인물이 바로 주희이다.


<중국철학사>는 강유위, 담사동, 요평 등 청말의 사상가에서 끝난다. 기술도 단순하고 거칠다. 이는 <중국철학사>를 기술할 당시의 역사적 상황(중일전쟁)의 긴박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청말 이후의 철학을 어떻게 설명할지 매듭짓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는 전통에서 철학에 속하는 것을 서술하였다. 아니, 전통을 철학의 언어로 새롭게 번역해 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통이 수명을 다한 이후에 대해서는 어떻게 서술해야 할지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청의 몰락과 함께 <중국철학사>도 끝나겠지만 중국철학도 함께 끝난다고 할 수는 없다. ‘경학시대'의 종말, 경전이 경전의 지위를 잃은 시대에도 중국철학사는 계속되는가?


펑유란의 논의를 빌리면 이른바 ‘포스트 경학시대’에도 또 다른 종합과 발전이 있어야 할 것이라 상상할 수 있다. 실례로 그는 <정원육서貞元六書>라 불리는 연구서 <신이학>, <신사론>, <신세훈>, <신원인>, <신원도>, <신지언> 여섯권을 썼다. ‘신新’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주희에게서 보았던 새로운 종합과 발전이 자신의 시대에도 수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새로움에 대한 추구는 펑유란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도 그와 비슷한 작업이 있었다. 전통 사회에서 근대의 뿌리로 삼을만한 것을 찾아내어 이를 치켜세우고, 그 과업을 지금에도 다시 반복적으로 수행할 것. 우리에게는 이것이 실학과 개신유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개신유학을 주창한 이을호는 다산을, 특히 그의 경학을 연구한 인물로 유명하다.


루쉰과 같은 인물이 보기에 이는 새로움이라는 탈을 뒤집어썼을 뿐, 낡은 습속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한 어리석은 작업이었다. 새로움이라는 표현을 넣었지만 이는 혁명과는 전혀 거리가 먼 작업이었다. 이른바 혁명의 시대에 펑유란이 그다지 주목할만한 성과를 내놓지 못한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1940년대 이후 약 반세기 동안 그는 여러 고초를 겪는다. 문혁 당시 그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에 비해 루쉰은 혁명의 아이콘으로 크게 숭상되었다.


그러나 지금 펑유란의 시도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니, 펑유란이 끊임없이 근대의 언어, 철학을 빌어 자신의 ‘중국’을 설명하려 애썼다면 이제는 그런 수고로움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근대의 충격에 펑유란은 ‘중국’, 좁게는 중국철학에 근대의 시민권을 주고자 했다. 적어도 철학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주는 데는 얼마간 성공했다. 여전히 철학이라는 보편 학문의 세계에서 ‘중국철학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쉬이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근대의 도전에 소멸되지 않기를 애썼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20세기, 한 세기 내내 걸쳐 공자는 온갖 치욕을 다 당했다. 신상과 책이 불태워지는 것은 물론 봉건의 우두머리로 손가락질받았다. 어쩌면 수백, 수천년 뒤에 누군가는 두번째 분서갱유의 시대로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비판은 엉뚱하게 해소되고 말았다. 논리나 이론의 측면이 아니라 현실에서 공자는 살아남았고,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는 공자의 제자를 형상한 이들이 개막식에 등장했다. 옛 유가의 관복을 입고 손에는 죽간을 들고 수많은 이들이 행진했다. 공자의 삼천문도를 형상화한 것이란다. 자신을 세계에 소개하는 자리에서 공자를 언급한 그때 즈음, 천안문 광장에 공자 상이 세워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중국 내부에서도 논쟁이 일어 얼마 지나지 않아 치워졌지만 이전에는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농민 노동자 인민의 혁명 공간에 공자라는 봉건의 잔재가 얼굴을 들이밀다니!!


이 변화는 펑유란이 기도했던, 보편의 언어로 자신을 증명하고자 하는 그 노력을 넘어 이제 보편의 언어로 자신을 소개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펑유란의 시대에는 ‘중국’이 철학을 수식하는 말에 불과했지만 그 관계의 역전, 혹은 전혀 다른 배치도 얼마든지 가능한 시대로 들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시대에 그가 조망한 중국철학의 또 다른 특징, 종합과 발전이라는 과제는 어떻게 수행될 것인가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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