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부상과 ‘중국’의 부활

'중국'이라는 문제 - 루쉰과 펑유란의 모색 #4

by 기픈옹달
우리실험자들http://experimentor.net/ 열린강좌 내용을 나눕니다.
총 4부분으로 나눌 예정입니다.

#1 중국을 사유하기 :: https://brunch.co.kr/@zziraci/70
#2 루쉰,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자 :: https://brunch.co.kr/@zziraci/73
#3 펑유란, 철학의 시민권을 취하라 :: https://brunch.co.kr/@zziraci/74
#4 중국의 부상과 ‘중국’의 부활 :: https://brunch.co.kr/@zziraci/75



중국의 약진을 두고 여전히 말이 많다. 2000년대 초반에는 중국의 내부 모순이 중국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주장이 많았다. 부정부패, 빈부격차, 민족 갈등, 인권문제 등으로 중국이 크게 흔들리는 것은 물론 국가 체제 자체가 위험하다는 주장도 있었다.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과연 지금도 중국은 위기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흥미롭게도 제기되었던 문제가 어느 하나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현실이 논리와 이론을 압도하는 상황이다. 이미 ‘부강몽’을 이룬 중국은 이런 문제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도리어 그들은 세계체제를 새롭게 재편하려 한다. ‘일대일로’라는 말처럼 그들은 세계적 경제, 정치 체제를 자신들을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한다. 정치, 경제, 군사적 관점에서 이미 변화는 진행중이다. 머지않아 문화와 학술의 영역에서도 변화가 감지되지 않을까. 어느 순간에 이르면, 검토하고 분석할 대상이 아니라 학습해야 하는 대상으로 눈앞에 닥칠지도 모를 일이다.


조경란은 세계사를 보건대 어느 제국도 부활한 예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부활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주역> 건괘의 효사는 잠룡물용潛龍勿用으로 시작한다. 물에 잠긴 용은 쓸 수 없다. 잠재성에서 보자면 용일지 모르나 이무기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러나 비룡재천飛龍在天, 하늘로 날아오른다면 상황이 다르다. 어떤 짐승도 감당할 수 없는 막강한 존재가 등장하는 것이다. 항룡유회亢龍有悔, 너무 올라간 용은 다시 땅으로 떨어져 내려야 한다. 지금 중국의 현주소는 어디쯤일까? 수십년간 잠용이었지만 하늘로 비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허나 과연 어느 정도인지는 잘 가늠되지 않는다. 이미 다 올라왔는가? 아니면 이제 막 오르기 시작한 것일까? 한창 비상하고 있는 상황인가. 여러 의문이 뒤따르지만 적어도 이 비상이 쉬이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제국 중국의 부상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비상의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데 있다. 문화적으로 건 지리적으로 건 혹은 정치적으로 건 앞으로 중국의 영향력은 커질 것이 확실하다. 아니, 현재적 문제도 쉬이 해결하고 있지 못하다. 중국은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숙제다. 게다가 이것이 ‘중국’이라는 문명세계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기에 더욱 간단치 않다. 그렇기에 이 문제는 새로운 문제라기보다는 오래된 문제이다.


나는 중국과 한국의 문제를 푸는 것과는 다른 태도로 ‘중국’이라는 문제를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공자를 이야기해보자. 그는 중국인인가? 물론 이렇게 서술될 수는 있다. ‘공자: 중국 철학자’ 펑유란이 언급한 것과 같이 소크라테스를 빌려보자. ‘소크라테스: 그리스 철학자’ 크게 문제 되지 않는 서술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우리는 그를 그리스인, 현재 존재하는 그리스라는 근대국가의 일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 우리는 공자를 중국사람이라고 할 때 그에게 있지도 않는 국적을 심어주고 있는 건 아닐까? 그는 ‘중국’의 인물임에는 틀림없으나 중국인은 아니다.


연구실에서 세미나를 하다 보면 이런 질문을 받는다. ‘중국 고전만 읽지 말고 우리 고전을 읽으면 어떨까요?’ 그러나 나는 바로 위에 이야기한 이유로 이런 질문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학문에 국경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고전에는 국적이 없다. ‘중국’은 중국의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중국'을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태도이다. 그리스 철학을 배우면서 이것이 누구의 것인지를 따지지 않으면서 <논어> 따위를 읽으면서는 왜 다른 질문을 품는가? 물론 보다 복잡한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위에서 소개한 루쉰과 펑유란은 중국의 문제를 고민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중국’의 문제를 고민한 이들이었다고 해야 한다. ‘중국’이 천하 세계, 문명 세계의 중심 자리를 잃었을 때 저들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탈출구를 모색했다. 한 인물은 독립적이고도 고유한 개인의 출현을 꿈꾸었다면, 다른 인물은 보편의 언어로 세계를 새롭게 구축하고자 했다. 그들의 시도는 각각의 성과를 남겼고 저마다의 유산을 낳았다.


오래된 문제가 되돌아오고 있다. ‘중국’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물론 이 둘 이외에도 참고할 인물이 여럿 있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이 둘을 함께 묶어 언급하게 되었다. 논의는 성글고 질문은 크다. 거친, 채 완성하지 못한 밑그림이라는 생각이다. 작은 이정표라도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긴 지면을 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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