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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테리 김작가 Feb 20. 2022

(귀) 신은 없다.

내가 태어난 집안은 제사를 모신다. 나는 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찌 보면 나에게도 모태신앙이 있는 것이다. 조상님들을 잘 모셔야 복을 받고 무서운 일들을 피해 갈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기 때문에 제사라는 의식이 굉장히 중요한 행사였다. 그런데 모셔야 할 조상님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1년에 적어도 6~8번 정도의 제사를 지냈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하얀색의 한복을 입으시고 정성스레 지방을 직접 쓰셨는데 항상 먹을 가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한지였는지 어떤 종이에 두 줄로 한자를 쓰셨는데 난 아직 그게 무슨 의미의 글귀인지 모른다. 제사상이 차려지면 향을 피우고 양초에 불을 붙이는 것도 나의 할 일이었다. 모든 것이 준비되면 집안의 남자들만 우르르 나와 2열 횡대로 서서 두 번 절을 한다. 그리고 수저를 옮긴다. 그리고 다시 절을 두 번하고 또 다른 음식으로 수저를 옮긴다. 그날 모시는 조상님이 여러 가지 음식을 맛보시라고 그러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 과정이 끝나면 이제 집안의 여자들의 차례다. 비슷한 과정을 몇 번 치르고 나서 다들 모여서 음식을 먹는다.


모태신앙이라서 그런지 나는 정말 깊게 조상님을 믿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어떨 때는 꿈에서 조상님을 뵌 것 같기도 해서 겁이 났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제사를 정성스레 지내고 있으니 나에게 나쁜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부모님께서는 뭔가 나쁜 일이 생기면 정성이 부족하다고 여기셨고 절에 가서 뭔가를 하셨던 것 같다. 아마 절에서 제사를 더 지냈거나 절을 빡쎄게 하시거나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모든 집안의 좋고 나쁜 일들은 조상님들의 무드에 맞춰지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2003년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불치성 난치병에 걸린다. 절대 나을 수 없는 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어렸다. 고작 23살이었으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 나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정성이 부족해서다. 2~3년 동안 조상님들께 참으로 절실하게 기도했던 기억이 있다. 사촌동생들은 집안일이나 제사에 참여도 하지 않는데 나에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며 절을 하며 마음속으로 외치곤 했었다. 


멀쩡하게 살고 있는 친구들도 만나기 싫었고 혼자 기나긴 방황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방황의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척추염 환자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렇게 조상님 탓만 해 봤자 나만 손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먼저 담배와 술을 끓어야 하고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게 운동을 해야 했다. 몸무게를 줄이고 관절 주위의 근육을 키워 주어야 한다. 실없는 농담 중에 살을 빼거나 담배를 끊거나 술을 끊는 사람은 독한 놈이라 상종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있었다. 난 말 그대로 상종 못할 놈이 된 것이다. 수영장과 헬스장, 사우나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녔다. 물론 담배는 완전히 끊었고 술은 정말 필요할 때 아니면 거의 마시지 않았다. 20대 남자의 세계에서 술을 끊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참 어렸다…… 웬만해서는 약속을 잡지 않았다. 아마 20kg 정도 살을 빼고 체지방이 3.8% 정도까지 관리를 했었다. 완치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놀랍게도 염증 수치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때 당시 복근 강박증이 있었다. 복근이 보이지 않으면 몸이 아픈 것 같았다. 열심히 꾸준히 관리하여 통증이 줄어들긴 했지만 몸도 좋아져 자존감도 높아졌다. 그때 당시 파격적인 의상들을 많이 입었던 기억이 있다. 유일하게 실패했던 옷이 스키니진이다. 타고난 골격 때문에 발목뼈에 스키니진이 걸려 입지 못했다. 그때 당시에 알게 된 지인들은 내가 날라리인 줄 알았다고 한다. 


2014년 난 또 다른 시련을 겪어야 했다. 기형적인 뇌혈관에서 뇌출혈이 생겨버린 것이다. 수술은 실패했다. 그 후로 두세 번의 재출혈을 반복하며 결국 몸의 일부 기능을 상실하고 또 몸이 타들어가는 듯한 신경통증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강직성 척추염을 극복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견뎌낼 수 있었다. 물론 힘든 시기가 있었지만 내가 처한 현실을 얼른 받아들일 수 있었고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고 있다. 


두 번의 큰 시련을 겪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꿈에서 조상님이 주는 빨간 열매를 먹으니 몸이 나아졌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나 고통을 대신 느껴주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아무리 절하고 기도해도 그 순간마저도 아프기만 했다. 고통이든 뭐든 결국은 내가 감내해야 하고 이겨내야 하는 일들이다. 의지가 꺾일 때마다 옆에 있어준 것은 신이 아닌 사람들이다. 아프다고 칭얼대는 나를 받아준 것도 나의 아내였고, 힘내라는 응원의 문자를 보내주고 위로해준 것도 주변 사람들이었다. 기적을 일으켜주는 신도 귀신도 조상도 없었다.


코로나 때문에 요즘처럼 살기 힘든 때가 없다. 마스크가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고, 서로 눈치게임을 하듯 의심하고 피해 다녀야 한다. 덩달아 전반적인 경제적인 어려움이 심해지면서 삶의 여유가 없어져 점점 각박해져 가고 있다. 현실이 힘들어질수록 기적 같은 일들을 바라게 된다. 로또의 기적을 내려달라고 할 때마다 똥들이 가득한 꿈에서 보이는 번호들은 나의 환상이더라. 로또의 신 따윈 없다. 오늘 하루도 충실히 살아가는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짝짝! 짝짝짝! 짝짝짝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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