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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Nov 13. 2022

가을이면 '시'를 읽지

오은 '이력서'

이력서


                    오은


밥을 먹고 쓰는 것.

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

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


나는 잘났고

나는 둥글둥글하고

나는 예의 바르다는 사실을

최대한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 오늘 밤에는, 그리고


오늘 밤에도

내 자랑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

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


달콤한 혀로 속삭이듯

포장술을 스스로 익히는 시간.


다음 버전이 언제 업데이트될지는 나도 모른다.

다 쓰고 나면 어김없이 허기.


아무리 먹어도 허깨비처럼 가벼워지는데

몇 줄의 거짓말처럼

내일 아침 문서가 열린다.


문서상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다.

<나를 키우는 시 2> 오은의 '이력서'



나는 이력서라는 소재로 시를 쓸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시의 소재가 된다. 소재를 잘 구워삶아 주제를 드러낸다. 지나온 이력서를 쓰던 시간을 되돌아본다. 어금니를 깨물고 현실보다 낫게 스스로를 치장하면서 묘하게 거짓을 일삼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내용을 적는데도 석연찮은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나를 호소하기 위한 소심한 자화자찬이라고나 할까.


시인은 이력서를 쓸 때의 복잡한 심경을 잘 옮겼다. 그 모습이 마치 왈츠 같다거나 시끄러운 팬터마임 같다는 표현에서 빵 터지고 말았다. 있어 보이는 사람인양 어떻게든 잘 보이려는 노력을 왈츠나 팬터마임으로 표현하다니. 수면 아래 물갈퀴를 미친 듯이 휘저으면서도 수면 위 모습은 우아한 백조처럼, 자신을 어필하기 위한 몸부림치는 처절함(달콤한 혀로 속삭이듯 / 포장술을 스스로 익히는 시간)이 수면 아래와 같고, 의도성이 짙지 않게 전달하려는 숨김의 표현(최대한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 오늘 밤에는)은 물 위의 모습을 닮았다.


그런데 "오늘 밤에는"이라는 구절에서 고개를 갸웃해본다. 이력서를 준비하다 보면 보내기 직전까지 선택받기에 적절한 사람이 되려면 어떤 정보를 담아야 할지, 자기소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백만 번 고치게 된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작성을 하고 다음날이 되면 최선을 다한 내용은 이불 킥을 부르는 내용이 된다. 아마 시인은 그런 지점을 반전처럼 남기고 싶지 않았을까?


이력서를 최종 완성하는 밤의 나와 다음날의 나의 간격을 "문서상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다"라고 말한 것 아닐까.



사회생활을 할 때 경쟁은 당연지사다. 인재를 발굴하려는 기업이나 기관의 숙명이듯, 자신을 스스로 업데이트해서 시장에 내놓기 좋도록 성장하는 게 보통사람의 길이다. 그런 성장을 은근히 자랑하고 숨기듯 보여주는 것은 지혜며 요령이다. 그런 자기 피알과 포장 뒤 따르는 헛헛함을 지울 수 없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자신의 장단을 그대로 보여주고도 모두 함께 흥이 나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면 얼마나 좋을까. 수많은 시간 이력서를 쓰고 자소서를 완성하면서 느꼈던 현실의 나와 서류상의 나의 갭 차이. 최상을 남겼지만 헛헛함을 지울 수 없다는 생각. 결국, 대충 적을 수 없는, 대단한 이력이나 수상경력의 결핍감. 서류에 온갖 것을 끌고 와 괜찮게 채워 나를 증명하는 쓸쓸한 기분. 내가 겪어본 이력서를 쓰던 유쾌하지 않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오은 시인조차 이런 류의 기분을 알 것만 같은 위안. 오은 시인의 현실적이고 위트가 살아있는 이 시로 공감대를 느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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