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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Jun 17. 2024

18. 청보리

도덕경 59장

1.

아버지는 쌀밥을 좋아하셨다. 부드럽고 달달하고 고소한 쌀밥을 먹을 때면, 밥이 꿀꺽꿀꺽 잘 넘어갔다. 도시락을 싸야 했던 초등학교 시절 갑자기 혼식장려운동이 벌어졌다. 말은 ‘장려’지만, 실정은 ‘압박’이었다. 흰색 쌀밥 도시락을 싸 온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혼났다. 보리쌀 30% 이상을 섞어서 도시락을 싸 오라는 지침(?)이 떨어졌다. 점심시간마다 담임선생님은 도시락 검사를 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쌀밥을 고집하셔서, 밥솥에 한쪽은 쌀을 한쪽을 보리를 넣어 밥을 지었다. 아버지 밥그릇에 고봉으로 쌀밥을 퍼담고, 남은 쌀과 보리를 잘 섞어 도시락을 싸갔다. 새까만 보리밥이라는 표현을 들어서 나는 보리밥은 까만 줄 알았는데, 누랬다. 맛은 거칠고 쌀밥만 못했다. 마지못해 배가 고파 보리밥을 먹었다.

혼분식장려운동 포스터. 내가 태어난 1964년에 시작하여 1977년까지 이어졌다.

어느새 쌀생산량도 증가하여 이제는 쌀밥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지만, 예전에는 베트남에서도 우리나라에 쌀을 지원해 줄 정도로 생산량이 넉넉지 않았다. 밥을 지어도 뭉치지 않는 길쭉한 안남미밥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결혼을 하고 나서 현미를 주로 섞어 먹었다. 건강을 생각한 아내의 조치였다. 처음에는 먹기 힘들었지만, 버릇을 들이니 오히려 고소하고 맛있었다. 건강은 덤.     


2.

가파도 하면 청보리, 청보리 하면 가파도다. 청보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보리가 익기 전에 푸르게 자라는 보리밭이 명물이라 가파도에서는 매년 청보리 축제를 한다. 게다가 가파도 보리는 바닷바람을 맞고 자라 그 향과 맛이 짙다. 내가 도정한 보리쌀을 넣어 밥을 지어먹어봤는데, 고소함이 더했다. 미숫가루는 그 맛이 짙어 아주 구수했다. 4월 청보리 축제가 끝나면 5월까지 수확을 마친다. 그러니 5월이 지나면 청보리를 구경할 수 없다.

제주도에 갔더니 청보리 막걸리, 청보리 미숫가루 등 가파도의 이름을 걸고 파는 곳이 많다던데, 가파도에서 그렇게 많이 청보리가 생산되지 않는다. 대부분 이름만 딴 상품이리라. 아니면 함량이 아주 적든가.


물론 가파도의 주 생업은 어업이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거나, 물질을 해서 해산물을 캔다. 예전에는 농사를 짓는 분들도 많았고, 심지어 소를 키우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집에서 먹을 작물을 키우는 작은 텃밭을 가꾸는 것으로 만족한다. 보리농사는 마을의 몇 분들이 전담하여 짓는다. 수익이 많이 남지도 않아, 매번 내년도에는 아예 짓지 말아야겠다고 말씀하시기도 한다. 게다가 관광객들은 애써 키워놓은 보리밭을 짓밟고 들어와 기념사진을 찍는 만행(?)을 저지르니 농사꾼의 심사가 뒤틀릴밖에. (사진 찍는 것이 관광의 대세지만, 해도 너무하시는 분들이 많다. 아예 보리를 뜯어서 들고 다니시는 분도 있다. 절도죄다.)     

3.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농업인구가 90%가 넘었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농업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자가 살았던 시대는 더더욱 그러했다. 농업기술이 발달하여 농기구도 개선되고, 짐승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고, 이모작이 가능하게 되어 생산량이 증가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백성이 배불리 먹을 정도로 식량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귀족들과 관료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는 심해져 풍족히 지어도 늘 모자랐다. 전쟁통에 끌려 나가고 논밭을 빼앗기고 돌아다니는 유민 신세가 많았다. 농사를 안정되게 짓고, 농사를 방해하는 일은 될 수 있으면 하지 말아야 했지만, 말처럼 되지 않았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구호는 그저 구호일 뿐 농민들의 신세는 늘 떨거지였다.


노자는 농사야말로 자연의 흐름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점을 치고, 제사를 지내고, 정치를 하고, 제도를 마련하는 것은 농사를 잘 짓기 위한 것이었다. 하늘의 도와 사람의 덕은 농사를 짓듯이 자연스럽게 차근차근 흘러가고 쌓아지는 것이었다. 이 근본을 잊지 않아야 나라가 오래간다고 생각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나라는 농사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 밥이 없다면 생명도 없다. 농사가 없는 삶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인공지능의 시대가 온다고 하더라도, 생명체인 인간은 농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삶도 정치도 농사로부터 떨어져서는 안 된다. (영어번역에서는 ‘색(嗇)’을 농사라 번역하지 않고, 절제와 중용을 뜻하는 ‘Moderation’으로 번역했다. 그에 따라 해석은 천양지차가 되었다. 재미난 일이다.)  <도덕경> 59장이다.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일

농사짓는 일[嗇]처럼 하십시오.

농사짓는 일은 일찍이 도를 따르는 일입니다.

일찍이 도를 따르면 덕을 더욱 많이 쌓고,

덕을 많이 쌓으면 이겨내지 못할 게 없습니다.

이겨내지 못할 게 없으니 그 끝을 알 수가 없고,

그 끝을 알 수 없으니 나라를 다스릴만합니다.

나라를 다스림의 근본을 알아야 그 나라가 오래갑니다.

이를 일러 뿌리가 깊고 단단해지고, 오래 사는 길이라 합니다.(59장)  

   

治人事天 莫若嗇 夫唯嗇 是謂早服 早服謂之重積德 重積德 則無不克 無不克 則莫知其極

   

For governing a country well

there is nothing better than moderation.     

The mark of a moderate man

is freedom from his own ideas.

Tolerant like the sky,

all-pervading like sunlight,

firm like a mountain,

supple like a tree in the wind,

he has no destination in view

and makes use of anything

life happens to bring his way.     

Nothing is impossible for him.

Because he has let go,

he can care for the people's welfare

as a mother cares for her chi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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