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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Jun 19. 2024

20. 풀

도덕경 76장

1.

가파도에서 부지런함을 알아보는 기준 중에 하나로 그 사람이 사는 집 마당에 잡초가 자라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가파도에서 며칠 정도 집을 비우면 여지없이 풀들이 자라 마당을 어지럽힌다. 오래된 집일수록 마당의 시멘트가 균열이 생겨, 그 틈으로 온갖 풀들이 자란다. 뽑아도 뽑아도 뿌리째 뽑아 버려도 또 다른 풀들이 자라고 자라고 또 자란다.


태초에 가파도에 사람이 살기 전부터 살았던 것이 풀들이다. 가파도에 처음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원주민 행세를 하지만, 실상 원주민(?)은 풀과 나무와 벌레와 동물들이다.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심어놓은 작물들은 기실 원래 살았던 풀(인간에게 잡초라 불리는 풀)들의 입장에서 보면 침략종에 불과하다. 인간들이 원래의 풀들을 뽑아내 버리고 그곳을 갈아엎어 자신이 원하는 작물을 심었지만, 생명력에 있어서 작물은 잡초를 이겨낼 수 없다. 이 땅의 주인은 잡초이기 때문이다.     

2.

그나저나 그래도 집에서 사람처럼 살아가려면 잡초의 재생력에 감탄할 것이 아니라, 가끔은 김매듯이 풀을 잡아야 한다. 잡아놓지 않으면 그 왕성한 생명력으로 마당을 다 뒤덮을 수 있으니까, 키높이까지 웃자란 풀(나무)들은 톱으로 자르고, 낮게 깔려 퍼지는 풀들은 낫으로 자르고 호미로 캐내야 한다. 시멘트 틈으로 자란 것이니 캐내다가 시멘트마저 따라 부서지고, 틈은 더욱 크게 벌어져 더 많은 풀들이 자란다. 설상가상이다. 작은 풀 뽑으려다 큰 풀을 키우는 꼴이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마당에 앉아 잠시 쉬고 있으면 풀들이 눈앞에서 기지개를 켜며 자라고 있다. ‘저놈들이 더 자라기 전에 뽑아야 할 텐데.’ 생각만 하고 몸은 그대로 의자에 앉아 멍을 때린다. “오늘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내일의 할 일은 안 해버린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던 대학동창 놈이 떠오른다. 아, 이러다가 풀에 파묻혀 죽겠구나. 날씨는 덥고, 몸은 지치고, 마음만 어수선하다.   

  

3.

크고 단단하고 강한 것에 정신을 쏟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고 부드럽고 약한 것에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다. 노자는 후자이다. 문명사회가 만들어 놓은 거대한 공간에 살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어릴 적 살았던 공간, 풀과 나무가 생기 있게 자라는 작은 동산이 편했다. 잘난 척, 똑똑한 척, 부유한 척 뻐기는 사람들보다 하루하루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욱 마음이 갔다.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그의 어린 시절과 깊은 연관이 있었던 것 아닐까 내 멋대로 상상해 본다. 노자는 태어날 때부터 늙은이처럼 보였다고 한다. 몸이 허약하게 태어났던 것은 아닐까. 그럴 수 있다. 노자의 부모는 허약한 노자를 노심초사하며 애지중지 키웠을 것이다. 약하지만 결코 생명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부드러운 것은 것은 쉬 휘어지지만 부러지지는 않는다. 태풍이 불어오면 알 수 있다. 태풍이 몰아치면 거대한 나무조차 견디지 못하고 뿌리째 뽑히지만, 부드럽고 연약한 풀들은 바람에 휩쓸려 흔들리고 누울 뿐, 결코 뿌리가 뽑히지 않는다.      

강성한 나라는 곧 더 강성한 것을 만나면 무너진다. 단단한 무기는 더 단단한 것을 만나면 부러진다. 굳어버린 몸은 건강의 징표가 아니라 죽음의 표식이다. 아이들은 보들보들 부드럽지만, 시체는 뻣뻣하게 굳어버린다. 강한 것이 이길 것 같지만, 생명의 세계에서는 부드러운 것이 이긴다. 더 오래간다. 강한 것들을 감싸며 더 높게 올라간다. 담쟁이덩굴을 보라. 작고 부드러운 것들끼리 손에 손 맞잡고 더 견고한 벽을 타고 넘어가지 않는가. 그렇게 <도덕경> 76장은 작고 부드럽고 연약한 생명을 예찬하고 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부드럽게 약하지만

죽을 때는 딱딱하게 굳게 됩니다.

풀과 나무도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은 때 마르고 딱딱해집니다.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은 것들이고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산 것들입니다.

군대가 강하면 승리하지 못하고,

나무가 강하면 부러지고 맙니다.

굳고 강한 것은 아래로 내려가고,

부드럽고 약한 것이 위로 올라갑니다.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 萬物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

故堅强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

是以兵强則不勝, 木强則折, 强大處下, 柔弱處上.

     

Men are born soft and supple;

dead, they are stiff and hard.

Plats are born tender and pliant;

dead, they are brittle and dry.     

Thus whoever is stiff and inflexible

is a disciple of death.

Whoever is soft and yielding

is a disciple of life.     

The hard and stiff will be broken.

The soft and supple will prev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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