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전공하면서 얻게 된 가장 큰 전공병은 바로 개념 정의에 대한 강박증이다. 마치 셜록 홈즈가 사건 현장에서 단서 하나도 놓치지 않는 것처럼, 나는 대화 속에서 개념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으면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리고 이 강박증은 일상생활에서 종종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내곤 한다.
하루는 교수님과 함께 식당에 방문했다. 매콤 해물 나시고랭 출시 포스터가 크게 붙어있었다. '오, 맛있겠다!'라는 생각과 함께 메뉴판을 살펴보니, 그곳에는 '해물 볶음밥'만 적혀 있었다. 의아함을 느낀 나는 직원분께 질문을 던졌다. "포스터에 나온 매콤 해물 나시고랭과 메뉴판의 해물 볶음밥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직원의 대답은 간단했다. "둘 다 똑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 대답에 거부감을 느꼈다. '매콤'이라는 형용사가 붙었다 없었다 하는 것은 단순한 차이가 아닌, 두 메뉴의 본질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나시고랭'과 '볶음밥'을 동일한 것으로 봐도 되는 것인가? 마치 직원분의 대답은 'A는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니다'라는 역설처럼 들렸다.
의문을 제기하려던 순간, 교수님의 다정한 귓속말이 나의 귀를 스쳤다. "철학과인 걸 티 내지 마..." “넵.” 교수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개념어는 마치 빛과 그림자의 양면성을 가진 존재다. 한편으로는 사물과 현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빛과 같은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해와 혼란을 야기하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개념어를 마치 낡은 옷처럼 편안하게 입는다. 정확한 정의를 따져보기보다는, 상대방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대충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낡은 옷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모호한 개념어는 일상적인 소통을 편리하게 해 준다.
문제는 중요한 주제에 대해 논의할 때 발생한다. 마치 격식을 차려야 하는 공식 행사에 낡은 옷을 입고 갈 수 없는 것처럼, 중요한 논의에서는 정확한 개념어라는 새 옷을 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해와 혼란이라는 엉망진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잊지 말자. 소통의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다. 개념어라는 새 옷을 입었다고 해서 항상 올바른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대화하려는 노력이다. 개념어는 이러한 노력을 돕는 도구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아니다.
나는 오늘도 철학과의 전공병을 억누르며 대화를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