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필 Oct 31. 2020

잘 지내시죠?

흔히 하는 말에 담겨 있는 또 다른 의미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어릴 적 그렇게 커 보이던 '어른'들이 흔하게 내뱉는 말을 나도 모르게 입버릇처럼 할 때다. 어찌보면 '어른'이 되었고, 또 어떻게 보면 머리가 굳어서 말조차 신선한 맛이 없이 퍽퍽해졌다.


그렇게 뻔한 말 중에 하나가 '잘 지내시죠?'이다. 물어보는 말임에도 상대의 답변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혹시 나만 그런 거라면 꼭 알려주기 바란다). 애당초 안부와는 거리가 먼 이 말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밥 한 번 먹자!'라는 말이 기약 없는 일정을 공수표처럼 남발하는 것이라면, '잘 지내시죠'라는 말은 상대의 처지를 통해 나의 위치를 가늠하려는 속셈이다. 성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진정성이 있겠으나, 나같이 보통의 사람은 이 인사말이 단순한 안부 인사가 아니다.


물어봤는데, 상대가 정말 '잘 지낸다'라고 하면 나는 왠지 모를 박탈감을 느낀다. 상대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나는 못 지내는데, 상대가 잘 지냈을 때 나의 힘듦은 두 배가 된다.


물어봤는데, 상대가 '못 지낸다'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안도감이 든다. 나의 힘듦이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동지를 만난 듯이 기뻐하고 잠시나마 힘듦을 잊는다.


그런데 나는 정말 나이브했던 듯하다. '잘 지내시죠?'라는 말이 으레 하는 말이듯이 '못 지낸다'는 말도 으레 하는 말이라는 사실.


대학교 때 일이다. 시험을 보고 나면 학과 사람들끼리 시험이 어땠는지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기 마련이다. 과 수석을 도맡아 하는 여학우들에게 물어보면(상위권으로 올라갈수록 남자들은 유독 맥을 못 췄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항상 이런 반응이었다. 우선 얼굴 한쪽을 일그러뜨리고 세상 가장 힘없는 울상을 짓는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다. "완전 망했어." 그 말을 들으면 나는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비록 시험지를 절반도 채우지는 못 했으나, 이 분들이 이럴 정도면 시험이 되게 어려웠군. 나는 그렇게 망한 게 아니야. 재시 볼 정도는 아니겠는데." 속으로 내린 결론에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기쁨은 잠깐이고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백지 냈어', '이번에 재시 볼 거 같아'라고 했던 그분들은 여전히 과 수석이었고, 그 말을 믿은 나는 항상 재시를 보곤 했다. 재시 때문에 전국을 한 바퀴 돌기도 하였고(병원 교수님이 낸 시험에서 재시가 걸리면 해당 병원까지 직접 가서 시험을 봐야 했다), 학과 건물에 있는 교수님들 방을 무던히도 드나들었다.


'잘 지내시죠'라는 말에 '못 지낸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못 지낸다던 사람들은 실제로 잘 지냈으며, 잘 지낸다고 답했던 나는 거기에 비하면 '못 지내는 사람'이었다.  


이런 일을 겪으며 나도 좀 영악해질 필요가 있나 자문하곤 한다. 남들이 안부를 물을 때 온갖 호들갑을 떨며 '힘들다'라고 한숨을 쉴까?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를 외칠까?


가끔씩은 서로 다 까놓고 말하면 좋겠다. 정말 궁금해서 '잘 지내시죠?'라고 인사를 건네자. 그리고 잘 지내면 잘 지낸다고, 못 지내면 못 지낸다고 제대로 답해보자. 진심을 담아 당신에게 묻는다. 잘 지내시죠?

(2020.10)

이전 17화 기분이 안 좋을 때 대처하는 방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