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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링서재 Dec 13. 2024

미안하다. 찹스테이크

 마지막 항암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왔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내 방이 얼마나 아늑한지 내 침대가 얼마나 포근한지 매일 새롭게 적응하던 시기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아름다웠고, 매일 뜨는 태양이 사랑스러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아닌 내 방 이불에서 나는 깨끗한 세제 냄새,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에 언제까지고 흠뻑 취하고 싶었다.     


 여섯 번의 약물 치료를 견뎌낸 나의 몸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민머리나 퉁퉁 부은 얼굴 같이 한눈에 드러나는 외형의 변화뿐만이 아니었다.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쓰지 않았던 근육도 많은 부분 소실된 듯했다. 걷기가 힘들었다. 짧은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흐르고 온몸 구석구석에 힘이 들어갔다. 첫걸음마를 한 이레 이십 년을 걷고 뛰던 내 몸은 1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병상 생활로 무너졌다.


 연일 묽은 미음만 먹다가 드디어 무언가를 씹어 삼킬 수 있게 되었을 때 겨우 밥알이 섞인 누룽지를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개어내지 않게 되자 엄마는 야심 차게 ‘찹스테이크’를 만들어 내 앞에 대령했다. 단백질이 많은 고기를 먹어야 근육이 붙는다며 남기지 말고 꼭꼭 씹어 먹으라고 했다. 나의 위장은 아직 고기를 받아들이기엔 다소 버거웠지만, 소스에 흠뻑 젖어 윤이 반들반들하게 나는 소고기와 색색깔의 파프리카를 보고 있자니 기분까지 알록달록 즐거웠다. 그릇까지 통째로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날 엄마표 ‘찹스테이크’를 처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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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이었다. 일명 IMF라 불리는 외환 위기 사태가 발발했다. 그보다 조금 앞서 아버지가 책임자로 있던 공장에는 큰 불이 났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아침마다 배달되는 조간신문을 통해 집안의 비극과 나라의 비극을 함께 접했다.


 엄마는 집에 있는 금이라는 금은 다 팔아치워 가정의 위기와 국가의 위기를 함께 헤쳐나갔다. 집에서 살림만 하고 있을 수 없었던 엄마는 제일 친한 친구의 레스토랑에서 파트타임 근무를 시작했다. 주방 보조 업무였다.      


 절친한 친구의 레스토랑에서 근무하며 젊은 주방장에게 무시 아닌 무시를 당하면서도 엄마는 꿋꿋했다.  친한 만큼 더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서운한 내색도 힘든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 맞춰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저녁이면 마늘버터 같은 것들을 배워와 집에서 만들어 주었다. 다진 마늘과 파슬리 가루 같은 것들을 버터에 넣어 잘 섞은 다음 빵에 발라 구워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이지만 20세기말 집에서 만든 마늘빵은 그저 신기하고 맛있는 근사한 요리였다.      


 ‘찹스테이크’도 주방 보조 시절 곁눈질로 배운 요리라 했다. 내 앞에 커다란 접시를 내려놓는 엄마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기대에 찬 미소가 기억난다.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고기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그때 내가 찹스테이크를 얼마나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매우 감동적인 맛이었다는 것은 기억이 난다. 아마도 엄마의 기대보다는 많이 먹었을 것이다. 엄마의 밝은 얼굴이 함께 떠오르는 걸 보면 말이다.     

 

[알록달록 찹스테이크 만드는 법]

1. 깍둑 썬 소고기 안심은 핏물을 제거하고 소금과 후추로 밑간을 한다.

2. 양파와 파프리카를 소고기와 비슷한 크기로 썰어 준비한다.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등 다양하게 준비하면 좋다.

3. 스테이크 소스에 케첩, 설탕, 다진 마늘을 넣고 잘 섞어둔다.

4. 달군 팬에 버터를 녹여 고기를 볶는다.

5. 고기의 표면이 익으면 썰어 둔 야채와 배합한 소스를 모두 넣고 버무리듯 볶는다.

6. 맛을 보고 싱거우면 기호에 따라 설탕, 후추를 추가한다.

7. 예쁜 그릇에 담아 맛있게 먹는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했던가. 가세가 기울고 채 회복되기도 전에 내가 아프기 시작한 거다. 엄마는 인생에서 그 몇 년이 가장 힘든 시기 중 한 때였다고 한다.


 엄마의 머리카락은 아빠의 사업이 위기를 겪을 때에도 흑단처럼 검었지만 내가 입원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하얗게 새기 시작했다. 날이면 날마다 내 머리털을 걱정하던 엄마는 검은콩을 삶아서 갈아서 그렇게 나에게 먹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검을 콩을 먹어야 할 사람은 엄마였다. 난 젊었고 머리는 금방 자라났다.


 어느새 그 시절 엄마의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친구들과 달리 난 아직 흰머리가 나지 않는다. 엄마 검은콩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다가오는 주말에는 찹스테이크를 만들어 엄마와 함께 먹어야겠다. 그리고 얼마 전에 산 두유제조기로 검은콩 두유를 잔뜩 만들어 엄마의 냉장고를 꽉꽉 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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