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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링서재 Dec 10. 2024

모던보이의 미역국

 잠결에 구수한 밥 냄새를 맡는다. 달궈진 참기름의 고소한 향도 나는 듯하다. 꿈인가? 아니면 어젯밤 창문을 열어두고 잤나? 겨울인데. 이 새벽 이웃집의 분주한 주방을 떠올리며 까무룩 깊은 잠에 다시 빠져든다.

 푹 자고 일어나 거실로 나가니 식탁 위에 미역국 한 그릇이 오도카니 놓여 있다. 아무래도 꿈은 아닌 모양이다. 이웃집 주방에서 나는 냄새도 아니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결혼 10년 만에 남편이 미역국을 끓였다.      

 

 우리 집 양반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고등학교 때부터 결혼 전까지 10년을 넘게 자취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란프라이, 라면, 참치김치찌개, 김치볶음밥이 할 줄 아는 요리의 전부였다. 애초에 음식을 만드는 행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내가 우리 집 음식을 도맡아 하는 것은 여자라서, 아내라서가 아니고 단지 그 사람보다 요리를 훨씬 잘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리하여 나는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이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 남편을 마지막 남은 ‘조선남자'라 칭하며 열심히 밥을 해 먹였다.  



   

 연애시절 그 사람이 대학 다닐 때의 일화를 들려준 적이 있다.      


 “그날은 용돈이 똑 떨어져 돈이 하나도 없었어. 배가 너무 고파서 냉장고를 뒤지는데 김치랑 먹다 남은 찬밥이 한 주먹 있는 거야. 그래서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기로 했지. 때마침 식용유도 간당간당 하게 남아 있더라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밥을 넣고 볶기 시작했어. 그런데 밥에서 거품이 나는 거야.”    


 김치볶음밥에서 거품이 나다니, 의아했다. ‘김치에 문제가 있었나? 밥이 상했나?’ 생각하던 찰나에 그 사람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볶으면 볶을수록 거품과 함께 이상한 냄새도 나는 거야. 뭐야, 싶은 순간 깨달았지. 조금 남아 있던 노란 액체는 콩기름이 아니고 ‘퐁퐁’이었어. 그래서 그날은 쫄쫄 굶었지.”     


 ‘아니, 그럴 수 있나? 콩기름과 ‘퐁퐁’을 착각할 수가 있나?’ 그렇다. 좀처럼 집에서 밥을 해 먹는 일이 없던 그 사람은 설거지를 할 일도 별로 없었으므로 ‘퐁퐁’을 병에 담아두고 한참이나 잊고 있었던 거다.     


 결혼 후 임신 중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심한 입덧으로 친정에서 한참을 머물다 조금 호전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입덧이 완전히 끝난 상태는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남편이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열흘 동안 참치김치찌개와 계란프라이, 김을 먹었다. 하다못해 소시지라도 한 번은 구울 법도 한데 매일 똑같은 메뉴로 나에게 숟가락을 건넸다. 딴에는 본인이 제일 좋아하고 제일 잘하는 음식이니 나에게 매일 먹이고 싶었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입덧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다시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랬던 남편이 내 생일날 미역국을 끓였다. 회사 구내식당 조리사님과 온라인에서 얻은 정보  조합하여 만든 미역국으로 나름의 이벤트를 준비한 것이다. 그 새벽에 국을 끓이고 뿌듯해하며 출근했을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난다. 미역국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간도 딱 맞았다. 아빠가 직접 끓인 국이라니 아이도 몹시 ‘신기해하며’ 맛있게 먹었다. 개인적으로 단 하나 아쉬웠던 점은 ‘마늘’이었다.

   

[NO 마늘 미역국 맛있게 끓이는 법]

1.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소고기를 볶는다.

2. 깨끗이 씻어 불린 미역과 국간장을 넣어 달달 볶는다.

3. 육수를 붓고 팔팔 끓인다.

4. 깊은 맛을 내기 위해 참치액젓을 살짝 넣으면 좋다.

5. 부족한 간은 소금으로 마무리한다.     

 미역국에 마늘을 넣냐 마냐 하는 주제는 요리 좀 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커뮤니티에서는 주기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소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미역국에 마늘은 사절한다. 마늘을 좋아해서 요리할 때 듬뿍 넣는 편이지만 미역국만큼은 안된다. 순전히 개인취향이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마늘을 넣은 미역국도 너무 맛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마늘보다 감동이 더 크게 들어간 듯하다.   


맛있게 먹고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맛있었냐고 물어봐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남편은 퇴근 후에도 또 물었다. 여러 번 물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한참을 물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남편은 조선남자에서 모던보이로 승격되었다. 안타깝게도 그 이후엔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으므로 아직 모던보이에 머물러있다. 다시 겨울이 되었고 내 생일을 앞두고 있다. 남편이 요리라는 날개를 달고 21세기형 ‘요섹남’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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