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마

대장마 속 우거지는 수풀, 도시가 사라져 간다.

by 두부언니


wind 04



Topˏˋ basilˏ orangeˏ bergamotˏ lemonˏ limeˏ petitgrain

Midˋˏ jasmineˏ roseˏ green leafˏ hedione

Baseˏˋ patchouli





작은 별은 녹색으로 뒤덮였다. 별을 집어삼킬 기세의 거대한 고목이 그 별의 한가운데 버티고 서 있었다. 고목의 가지마다 좁고 넓은 잎이 무성했다. 별이 태양의 주변을 365바퀴 도는 동안에도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대장마 속 작은 별은 온통 수풀 투성이었다. 어린 소년은 고목 아래서 비가 내리는 수풀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서있었다.


대장마 속 우거지는 수풀, 도시가 사라져 간다. 두엄더미를 필두로 시작된 유기체 무리가 각자의 형태를 띠고 사방으로 번져갔다. 건강한 토양과 그렇지 못한 토양을 가리지 않고 별은 녹색으로 물들어갔다. 사실 별의 아픈 구석이 회복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따로 불필요한 것들을 솎아 내거나, 모자란 것들을 길러오지 않아도 자연은 본래의 모습을 회복할 힘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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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되지 않는 건물이며 도로가 온통 이끼와 덩굴에 감겨, 시야에 걸리는 것이라곤 온통 녹색뿐이었다. 비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갓 베어낸 잔디의 냄새와 여린 잎이 나무껍질을 깨고 돋아날 때의 향내가 실려왔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봄이 온 것 같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소년은 두 눈을 감고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더 이상 차가 다니는 소리도 사람들의 발소리나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소리인지, 바람에 잔디가 눕는 소리인지 모를 것이 뒤섞인 채 귓전을 맴돌 뿐이었다. 그렇게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인 채 얼마간 서 있었을까. 별안간 잔디를 딛고 선 두 발이 사라진 듯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발가락을 조금만 꼼지락 거린다면, 혹은 발목을 약간만 비튼다면 이내 돌아올 것 같은 감각이었지만, 소년은 어쩐지 아주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발바닥부터 시작해서 발목을 타고 종아리와 허벅지로 무뎌지는 감각의 힘을 빌어, 이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씻겨 내려가거나, 무서운 속도로 별을 뒤덮고 있는 수풀과 하나 되어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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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는 시멘트를 감고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에 이르러서야 방향을 아래쪽으로 틀었다. 이제 녹음(綠陰)의 뿌리가 닿지 않는 장소는 이 별에 없었다. 그것은 소년을 제외한 모든 곳에 뿌리내렸다. 소년은 떠올렸다. 이 별에서 인간이 사라진다면, 별이 푸른빛을 되찾는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년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비로소 별은 제 속도를 찾았다. 더 이상 능력 밖의 속도를 내거나 인위적인 생김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고목은 작은 별만큼 거대해졌다. 별의 어느 쪽에 서서 바라 보아도 고목이 시야에 걸렸다. 소년이 서 있던 자리에는 작은 떡잎이 솟아 있었다. 흙바닥을 뚫고 갓 솟아 오른 여린 떡잎 위로 이슬이 맺혔고, 이슬은 떡잎을 타고 한 차례 구르더니, 이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비가 그쳤다.





Noteˏ
갓 베어낸 잔디 / 바람 / 여름 / 이슬 / 담쟁이 / 여린 잎

다양한 허브의 향이 풍부하게 느껴집니다. 마치 녹음이 가득한 어떤 공간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확실히 여름에 잘 어울리는 향이라고 생각했어요.

예전 살던 동네에는 100m 정도 되는 길을 따라 키가 큰 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어요. 여름이면 뜨거운 햇빛을 가려주었고,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 양탄자를 깔아주었으며, 겨울이면 함박눈을 피할 지붕이 되어주었는데, 어느 날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나무들이 모조리 베어져 나갔어요.

날이 갈수록 녹색이 사라지는 풍경이 아쉬웠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글 속에서라도 원 없이 녹음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런 기분을 느끼기에 충분한 향입니다.


*이 글은 paffem의 'wind 04. 연둣빛 풀꽃'향수를 테마로 작성된 단편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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