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밤을 불러 올 일이지요
time 04
Topˏˋ cognacˏ amber
Midˋˏ woody
Baseˏˋ tonka beanˏ vetiver
시침이 또 한 칸 옆으로 움직였다. 소리 없이 돌아가던 초침이 저 작은 원반 위를 벌써 예순 바퀴나 미끄러졌다는 이야기다. 온더락잔의 얼음이 녹아 서로 부딪히며 달그락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허리를 곧게 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갈라진 뒤꿈치에서 전해오는 통증이 조금 신경을 거슬렀다. 봄이 지날 무렵부터 굳기 시작하던 발뒤꿈치의 피부가 이제는 딱딱해지다 못해 가뭄이 난 논 밭처럼 주름 난 결을 따라 갈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 화근이었을까. 돌처럼 굳은 살에 이제 와서 바세린이니 뭐니 발라 보아도 영 차도가 없다.
오늘의 노을은 유난히 붉은빛을 띄었다. 그래서일까, 삽시간에 어두워진 지금의 하늘이 유독 칠흑 같아 보이는 것은. 대개 그랬던 것 같다. 태풍이 지나가고 난 뒤의 하늘은. 타는 듯한 붉은색이었다. 아침까지 파랗고 청명했던 하늘은 오후 5시를 지날 즈음 노랗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7시경에는 타는 듯한 붉은색을 띄었다. 건너편 건물의 외벽과 창문이 진홍색으로 물들었다. 화기를 머금은 듯한 하늘이 창틀을 넘어 방 안까지 들이닥칠 기세였다. 나는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켰다. 몸을 일으켜 거실의 커다란 미닫이 창을 닫으니, 이제서야 저 화기로부터 분리된 듯하여 조금 안심하는 마음이 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늘은 이내 어두워졌고, 지금은 칠흑 같은 어둠만이 창 밖을 가득 채우고 있다. 오늘따라 건너편 건물의 창에서도 빛 한줄기 세어 나오지 않았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세상을 물들이던 붉은빛은 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방의 불을 끈다면 완전히 어둠에 잠식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반 위를 가르는 초침만큼 소리 없이 밤이 왔다.
어두운 방 안에 남은 꼬냑의 잔향이 코끝을 스쳤다. 아마도 온더락잔에서 나는 향은 아닐 것이고, 뚜껑을 열어 둔 빈 병에서 나는 향일 것이다. 좋은 술은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거라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식도로 올라오는 그 향을 즐길 수 있어야 제대로 양주를 마셨다고 할 수 있다는 뭐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방안의 불을 켤까 잠깐 망설였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고 어둠을 더듬어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곤 매트리스 위에 몸을 바로 누이고 캄캄한 천장을 마주한 자세로 두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날이 밝아 있기를 바라며.
'새벽동이 그립다니요. 그렇다면 밤을 불러 올 일이지요' 기억 속의 누군가가 이야기했다. 밤은 괴롭다. 하지만 밤을 보내야 새벽이 온다. 그리고 새벽은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캄캄한 어둠이 걷히는 동트기 직전의 그 고요는 오래가지 않는다. 이내 해가 비추고 세상이 깨어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올 것이다. 거리는 잰걸음을 내는 발소리와 자동차의 바퀴가 내는 마찰음으로 점차 요란해질 것이다. 나는 세상이 깨어나는 그 순간부터 다시 새벽을 기다릴 것이다.
Noteˏ
망각 / 새벽동 / 밤 / 적막 / 어둠
8월 내내 덥다가도 9월이 되면, 신기하게도 밤공기가 선선해지고 습도가 내려가는 것 같아요. 그런 늦여름 밤에 샤워를 하고 나와 이제 막 노을이 넘어가기 직전인 창밖의 하늘을 바라볼 때면, 짧은 휴식 후에 금세 찾아올 분주한 낮시간이 조금 두려워지기도 해요.
새벽의 시간을 참 좋아하지만, 새벽은 정말 순간이잖아요. 그리고 또 소진하는 낮과 어둠의 적막을 지나고서야 다시 만날 수 있는 찰나잖아요. 그런 새벽에 함께하면 좋을 것 같은 향입니다.
(+덧)
남편 스웨터에 뿌려놓고 킁카킁카 하면 좋을 향입니다.
*이 글은 paffem의 'time 04. 평온한 인센스'향수를 테마로 작성된 단편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