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분리 없이는 ‘엄마’ 역할에서 벗어날 수 없다.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집이 곧 사무실이었다. 침대조차 들어가지 않던 작은 신혼집에서도 내 책상만은 어떻게든 지켜냈다. 저렴한 조립식 책상이라 앉을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났지만 그 자체로 충분했다. 컴퓨터, 파일 꽂이, 노트만 놓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훌륭한 사무실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이사를 한 집은 예전 집보다 공간이 여유로워졌지만 내 책상, 내 사무실을 차마 유지할 수가 없었다. 아이는 엄마가 집에서 자신과 놀아주지 않고 다른 일을 한다는 것에 분노했고, 어떻게든 내 책상 위로 올라오고자 발버둥을 쳤다. 집에서 아이와 함께 있는 상황에서 ‘일’에만 집중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공간의 분리가 없이는 결코 ‘엄마’ 역할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남편이 함께 있어도 결국엔 내 옆에만 오려고 하는 아이를 보면서 마음을 정했다. ‘그래, 돈이 좀 들어도 사무실을 임대하자!’
강남의 멋들어진 프랜차이즈 공유 오피스부터 개인이 운영하는 작업실까지. 손품을 팔아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곳에 컨텍해봤다. 공유 오피스는 특히나 홈페이지에 임대 비용이 정확하게 게시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하나하나 전화를 해서 정보를 얻었다. 강남과 종로처럼 회사 밀집 지역의 공유 오피스는 자유석이 월 30만 원대, 1인실이 월 60만 원대였다. 세상에. 나는 단지 매일 출근할 작은 책상이 하나 필요할 뿐인데 이렇게나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하다니.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서울 중심부가 아닌 지역에 위치한 작은 규모의 공유 오피스는 월 40만 원대였지만 이것도 역시나 나에겐 너무 비쌌다.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으려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그럼.. 월 30만 원 정도는 괜찮으세요? 지금 1인실 하나가 비어있는데.. 사실은 다른 분이 임대만 해놓고 사용은 안 하는 상태예요. 한 달에 한 번 확인만 하러 방문하십니다. 여기를 월 30에 저렴하게 쓰시게 해 드릴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응? 지금 나에게 이중계약을 하라는 건가? 솔직히 처음엔 솔깃했지만 정확히 3초 뒤에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 정중하게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다. 휴, 집 없는 설움에 이어 사무실 없는 설움까지.. 참으로 슬펐다.
그러다 귀인을 만났다(?). 집에서 15분 거리에 굉장히 멋진 인테리어의 공유 오피스가 있었는데 그곳의 담당자님이 나를 아신다고 하셨다(??). 인간극장과 휴먼다큐 사랑, 유튜브 항승주리와 블로그 사랑에 장애가 있나요? 까지. 10년 동안 온라인을 통해 나의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었는데 담당자님이 그것들을 꾸준히 지켜봐 주신 나의 팬이라고 하셨다. 세상에! 임대 비용이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 내고 있던 곳이었는데 담당자님께서 나에게 협업을 제안하셨다. 임대로 50% 할인을 받는 조건으로 월 1회의 홍보 포스팅 작성하기!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블로그 10년 차인 나에게 이건 말 그대로 꿀 같은 조건이었다. 정말 그거면 되시겠냐고, 더 해드릴 수도 있다고 재차 여쭤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주리 씨가 저희 오피스를 경험해보시고
정말 솔직하게 느낀 그대로를
작성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렇게 6개월의 사무실 임대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권 주 리, 내 이름 세 글자가 괜히 조금 멋지게 느껴졌다.
사실 프리랜서 연극 강사로 일하면서 꼭 사무실이 필요한 건 아니다. 오히려 차 안, 길 위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길다. 하지만 나에게 사무실이란 단순히 일을 하는 공간이 아니라 ‘엄마 역할에서 벗어나, 출근을 할 수 있는 곳’을 의미했기에 감회가 남달랐다. 출근 첫날, 집에서 사용하던 데스크톱 컴퓨터를 이고 지고 사무실에 입장했다(마음은 레드카펫을 밟는 배우였다) 책상 하나와 작은 서랍장 하나로 꽉 차는 1평 남짓한 사무실에 드디어 짐을 풀었다. 남편이 어딘가에서 얻어 온 작은 모니터까지 합해서 듀얼 모니터 컴퓨터를 세팅하고, 책꽂이에 각종 서류들을 꽂았다. 일부러 구입한 아이패드 거치대까지 설치하고 나니 말 그대로 ‘있어 보이는’ 책상이 완성됐다. 판교 IT기업의 베테랑 개발자가 된 느낌이랄까? 현실은 듀얼 모니터로 브런치에 글을 쓰는 작가 지망생이지만 마음만은 개발자였다. 인생 첫 내 자리. 내 이름이 적힌 사무실. 더 이상 다음 수업 시간을 기다리며 운동장 벤치에서 시간을 때우지 않아도 되는구나 생각하니 괜히 울컥했다.
매일 오전 7시 45분. 남편의 예전 출근시간과 동일한 시간에 나도 출근을 했다. 강요하거나 지켜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그냥 매일 같은 시간에 출퇴근을 하고 싶었다. 나가서 무슨 일을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나름의 루틴을 만들어서 지키고 싶었다. 오전 8시 5분, 사무실 도착. 커피 한 잔을 내려 책상에 앉으면 하루가 시작된다. 이메일을 열어 간 밤에 받은 중요한 메일들을 체크해보려 하지만 사실 그렇게 중요한 메일은 없다. “블로그 판매 가능한가요?”나 “먹으면 살이 쪽쪽 빠지는 칼로리 폭파 알약! 협찬해드립니다”같은 영양가 없는 메일만 가득했다. 그래도 괜찮다! 이제 시작이니까! 앞으로는 분명 아침 8시 5분에 중요한 메일에 답할 일이 생길 거야! 그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