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남은 시간 D-9년
나는 아이들이 회장 선거에 나가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설명했다.
“얘들아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키지 않고 농사를 지었다면 어땠을 거 같니? 물론 이순신 장군은 농사도 무척 잘했을 거야. 농사가 아니라 장사를 해도 잘했을 거야. 이순신 장군은 엄청난 전략가거든. 학익진을 생각해 봐. 장군은 무슨 직업을 가졌든 레전드가 되었겠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순신 장군만이 할 수 있는 일, 바로 그 엄청난 실력으로 나라를 지킨 거야. 마찬가지로 너희가 회장 선거에 나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니? 너희처럼 지혜롭고, 성실한 친구들이 바로 회장이 되어 너희반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거야.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사명이야. 너희가 넋 놓고 있으면 안 된단 말이야. 어떻게 생각해?”
나의 열변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하더니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엄마, 나 결심했어! 회장선거에 나가야겠어. 나 같은 사람이 회장선거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걸려들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너희는 나가기만 하면 당선이야. 친구들도 다 생각이 있단 말이지.”
나는 이 기세를 몰아 당장 연설문을 쓰게 했다. A4 절반가량 분량의 회장선거문을 쓰게 했다. 물론 내가 퇴고했다. 이런 것을 하려고 평생 책을 읽은 것이다. 이때만큼은 예리한 편집장이 된다. 내가 읽어도 명연설문이다.
선거가 있는 날, 나는 오바마 대통령이 명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과 쌍둥이들의 모습을 교차하며 아이들이 기쁜 소식을 들고 속히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혹시나 중간에 당선되었다고 문자를 먼저 보내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하루종일 아무 문자도 없었다.
삐삐 삑. 출입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나고 두 명의 아이들이 돌아왔다. 보통 좋은 소식이 있으면 의기양양해져서 돌아오는데 오늘은 평소와 다를 것 없었다.
“얘들아 회장선거는 어떻게 됐어?”
“떨어졌어.”
“둘 다?”
생각지 못한 대답에 당황했다. 분명히 연설문도 성의 있게 쓰고 발표 연습도 충분히 했는데..
"친구들이 연설을 너무 잘했어?”
“아니 친구들 모두 한 줄, 두줄 말하고 끝났어. 뭐 최선을 다하겠다. 한마디 했는데 당선됐어. 나는 발표도 또박또박 잘하고 글도 잘 썼는데 떨어졌어!”
민준이가 씩씩거리며 얘기했다. 나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정신을 차리고 아이들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너희가 전학을 와서 친구들이 아직 잘 몰라서 그래. 친구들도 시간이 지나고 친해지면 너희의 진가를 알게 될 거야. 속상해하지 말고 다 잊어버려. 너무 잘했어. 그런데 발표는 잘 하긴 한 거야?”
“응, 박수도 많이 받았어. 그런데 친구들은 정말 한 줄, 두 줄 성의 없이 준비했는데 당선이 됐어. 그게 말이 되냐고!”
민준이가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원래 우리가 친하고 익숙한 사람을 뽑잖아. 괜찮아. 세상이 원래 그런 거야. 그런데 너희 정말 잘했다. 아마 친구들도 발표는 너희가 제일 잘했다고 생각할 거야. 다음에 또 나가면 되는 거야.”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아쉬운 마음은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내색을 하거나 이 일을 계속 언급하면 아이들이 속이 상할 것 같아 평소에 하던 일상 속으로 빠르게 복귀했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은 금세 잊어버린 듯 평소와 같이 식사를 했다. 나는 궁금증이 일어나 다시 한번 아이들에게 물어봤다.
“당선된 친구랑 표 차이가 많이 났어?”
“아니. 한 표 차이.”
이번에는 내내 잠잠 코 있던 서준이가 대답했다. 갑자기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준이 너는 누구 찍었어?”
“민준이.”
오 마이갓.
회장에 출마한 친구들은 총 5명. 학급인원은 20명. 당선된 친구가 6표, 서준이는 5표, 민준이는 4표를 받았다고 한다. 서준이는 한 표 차이로 떨어졌는데 자신의 그 한 표를 민준이를 뽑은 것이다. 동률이 되었다면 민준이 표를 비롯하여 민준이 쪽 표심이 서준이에게 몰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당성가능성은 더 컸을 것이다.
투표의 기본인 가장 확실한 한 표인 자신의 투표권을 본인에게 행사하지 않았다니. 내가 이것을 알려줬어야 하는 건가? 나는 당연히 본인은 본인을 먼저 뽑을 줄 알았는데.. 사리분별 확실한 민준이는 역시 본인을 뽑았다. 선거는 역시 모르는 일이다. 마지막 한 표를 뽑을 때까지.
다음 날, 민준이가 피아노 학원에 간 사이 서준이와 함께 카페에 가서 민준이를 기다리기로 했다. 서준이는 주 2회 미술학원에 가는데 꼭 하루, 목요일은 시간이 빈다. 보통은 집에 있지만 오늘은 카페에 가기로 했다. 서준이는 엄마와 가끔씩 이렇게 데이트하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
“서준아 어제 민준이를 뽑아서 당선이 안되었는데 괜찮아? 당선된 친구는 인기가 많은 친구인가 봐?”
나는 서준이의 마음 상태가 궁금해져서 물었다.
“엄마, 당선된 친구는 걸그룹 춤도 엄청 잘 추고 인기가 많아. 나는 공부는 잘 하지만 인기는 없는 편이야.”
“그래?”
아들이 본인은 인기가 없다고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자 좀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서준이는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성격도 좋고 너무 멋진데 왜 인기가 없을까?”
물론 나는 아들바보이므로 내 아들이 지구 최강으로 멋지다.
“엄마 내가 설명해 줄게. 친구들은 두 가지 편으로 나뉘어.”
서준이는 빵을 입에 넣고는 두 손을 허공에 대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허공을 가르며 침착하게 얘기했다.
“왼쪽은 인기가 많은 편이야. 남자들은 게임을 잘하고 여자들은 걸그룹 춤을 잘하는 편이다. 이쪽 편은 인기가 많아.”
서준이가 눈높이로 왼팔을 뻗으며 장풍을 쏘듯 손바닥으로 공기를 밀어내며 얘기했다.
“나는 반대 편.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서 친구들이랑 게임도 안 하고, 유튜브도 많이 못 보니까 걸그룹이나 그런 것도 잘 몰라. 그래서 인기가 없어.”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래서 서준아, 당선이 못 돼서 속상해? 너도 인기가 많아지고 싶어? 친구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 너한테도 중요하지 않아?”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나에게도 중요한 순위가 있어. 3위가 게임이나 인기, 2위는 미술, 1위 공부랑 책. 나는 인기는 없지만 공부를 잘하는 게 좋아.”
나는 생각지 못한 쿨하고 명료한 대답에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서준아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지. 너는 지금도 너무 멋져. 엄마도 못하는 게 참 많아. 그대로 인정하고 잘하는 것에 집중하면 돼”
“그렇지. 그런데 엄마, 우리 둘이 카페에서 이런 얘기를 하니까 너무 좋다. 어른들이 회사에서 토론하는 거 같아.”
“그래 나도 너무 재밌다.”
카페를 나서니 따뜻한 태양빛이 조명을 비추듯 전신에 느껴진다. 서준이가 내 손을 꼭 잡는다. 오통통한 서준이의 손의 감촉이 좋다. 오늘의 태양빛은 우리만을 비춰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