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정 Oct 24. 2021

대공원

아베마리아

  병원을 나온 후 지하철을 탔다. 정확하게 무슨 감정이라고 표현하기 힘든데 화가 났다기보다는 울분이 차오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신했고 살면서 남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었는데 왜 나에게만 두 번씩이나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인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지하철에서 내린 뒤 집으로 가지 않고 무작정 대공원으로 향했다. 매서운 한파에도 공원에 사람이 꽤 있었다. 

  시의 외곽에 위치한 대규모의 공원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직선으로 곧게 이어진 길을 따라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신기하게 기분이 조금 풀어지는 것도 같았다. 그날 이후 방한 마스크와 귀마개, 장갑 등으로 완전 무장을 하고 대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체력이 약하기 때문에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여러 겹의 옷을 입어 추위로부터 방어체계를 구축해야 했다. 계속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대공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맑은 공기와 산속 풍경을 보며 기분 전환을 할 수 있었고 스트레스도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코로나 확산 방지 목적으로 정부에서 집합 금지 명령과 함께 대공원 폐쇄조치가 내려졌다. 그 기간 동안에는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는데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자니 부정적인 생각과 우울감이 증폭되었다. 그사이 코로나 확산세는 점점 심각해져만 갔고 여러 대학병원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했다. 의료기관 방문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지쳐갔다. 대공원은 폐쇄해도 인도는 폐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동네 둘레길을 탐색해 왕복 9km 정도의 코스를 거의 매일 걸었다. 방한용품으로 중무장하고 선캡을 착용했는데 자외선 차단 목적도 있었지만 요즘 시기에는 비말 차단 효과도 누려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지니뮤직이나 유튜브에서 추천하는 빠른 비트의 최신곡을 들으며 걷다 보니 요즘 시대가 원하는 아이돌 스타일도 파악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기분이 상쾌해져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었고 불면증도 사라졌다. 

  수도권 내 대학병원에서 줄줄이 코로나 집단 감염이 터지는 바람에 두 달 동안 병원을 가지 못했다. 가끔씩 약한 통증이 있기는 했지만 심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언제 다시 통증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항상 마음속에 있었다. 계속 망설이다가 유명하다는 난임 병원을 방문해보기로 했다. 대학병원과는 진료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부인과 수술을 앞둔 미혼 여성들에게도 방문해 볼 것을 추천한다는 인터넷 환우들의 후기를 읽었다. 일반 병원은 난소에 손상이 가해지더라도 재발을 막기 위해 최대한으로 제거하는 쪽에 초점을 둔다면 난임 병원은 임신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난소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진료를 본다고 했다. 결혼 후 아이가 있어 앞으로 임신할 계획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성들은 난임 병원에 꼭 가보라는 후기를 많이 봤다. 우리 엄마도 어디에서 이야기를 들었는지 주위에서 유명한 난임 병원을 소개해줬다며 수술 전 그 병원에서 소견을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 병원이 워낙 유명해서 그런지 예약도 쉽지 않았는데 몇 번의 시도 끝에 예약에 성공하게 되어 방문할 수 있었다. 병원에 들어가기가 조금 망설여졌는데 용기를 내서 안으로 들어갔다. 대기표를 뽑고 접수 순번이 되기를 기다리며 병원 안을 들여다봤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진료실 앞 의자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이렇게 난임 부부가 많은지 처음 알았다. 유모차를 끌고 온 사람도 있는 것으로 보아 둘째를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았다. 

  내 차례가 되어 접수 데스크로 갔더니 초진 환자는 진료 카드를 작성해야 한다며 기록지와 볼펜을 주었다. 필수 개인정보와 함께 직업과 학력 등 다소 민감할 수 있는 불필요한 개인정보까지 기재하게 되어 있었다. 특이한 점은 하나의 양식에 한 사람의 정보만 적는 것이 아니라 부부 두 명을 모두 적게 되어 있었다. 나는 미혼이라 남편 칸은 비워두었고 직업은 무직으로 적어서 제출했다. 접수 직원이 내가 작성한 양식을 보더니 여기는 난임 병원이라 일반 병원과 동일한 진료도 건강보험을 적용받을 수 없어 비용이 배우 비싸다며 굳이 이 병원에서 진료를 원하는지를 계속 물었다. 미혼은 일반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다른 병원을 갈 것을 여러 차례 권해주었다. 안 그래도 난임 병원이라는 특성 때문에 방문을 수 차례 고민했지만 큰 마음을 먹고 왔으니 진료를 보기로 했다. 

  접수 후 상담실로 들어가 상담 코디네이터에게 개인적인 증상과 미리 정해져 있는 일률적인 질문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했다. 처음 방문하는 병원에서 의례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일이지만 아무리 겪어도 힘든 과정인 것 같다. 코디네이터가 진료 의사를 지정해주고 난 후 진료실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유명한 의사는 따로 있었는데 그 의사는 난임 시술로 유명해서 대기 환자도 많았고 나의 현재 증상으로 그 의사에게 진료를 보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스스로도 했던 참이었다. 배정받은 의사는 여의사였는데 상당히 친절했고 오랜 시간 동안 상담도 해주었지만 실력은 그냥 평범한 수준인 것 같았다. 간단히 의사와 면담을 한 후 초음파실로 들어가 진료를 봤다. 초음파 기계를 통해서 보이는 모니터의 화질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의사는 꼼꼼히 내 하복부의 오른쪽, 왼쪽을 들여다봤는데 이번에도 오른쪽 난소는 안 보인다는 소견을 전달해줬다. 왼쪽 난소도 매우 깨끗해서 혹으로 보이는 것은 전혀 없고 생식 세포 주기에 따른 초기 배란 단계의 난포가 보인다며 화면으로 보이는 선명한 작은 알갱이를 가리키며 이게 난포라고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두 달 사이에 왼쪽 난소의 혹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오른쪽 난소가 보이지 않으니 향후 가임력을 파악해보기 위해 난소 나이 검사를 해보는 것이 좋겠다며 피검사를 권유했다. 알겠다고 답한 후 검사 비용을 수납했는데 비용이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많이 나왔다. 

  사흘 뒤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난소 나이가 나의 실제 나이보다 한 살 어리게 나와 정상 범위에 속한다고 했다. 난소 수치가 정상인 것으로 보아 오른쪽 난소가 장과 유착되어 안 보이는 게 맞는 것 같다고 해서 이것 또한 안심이 되었다. 의사가 나에게 미래에는 결혼을 할 수도 있으니 만약을 대비해 냉동 난자 시술을 권유하기도 했는데 그건 고민을 좀 더 해봐야 할 것 같다고 대답한 후 가벼운 마음으로 진료실을 나왔다. 냉동 난자 시술은 차후에 할 인공 수정 시술까지 고려해서 병원을 선택해야 할 것 같았다. 

  코로나로 인해 한동안 병원 진료를 보지 못한 기간 동안 특별한 목적 없이 단순히 걷기만 했는데도 상태가 호전되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돌팔이라 생각했던 의사의 소견이 맞아떨어진 부분도 있었다. 호전된 건강 상태에 감사하며 앞으로는 그 어떤 것보다 나를 우선순위에 둘 것이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배려받기 바라는 만큼 타인을 향한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으며 세상을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전 24화 수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