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지하철에서 흘러나오던 말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데 이런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다음 역은 충정로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 문 닫겠습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여느 때와 같은 녹음된 음성이 아닌, 열차를 운행하는 기관사님의 목소리였다는 점입니다. 다소 젊어 보이는 남성 분의 나긋나긋하지만 풀잎처럼 발랄한 목소리는 역마다 이어졌습니다. 다들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 화면만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서, 저는 괜히 그분의 생김새와 모습을 상상하며 천장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새삼 사람의 목소리를 들은 게 얼마만인지요. 이런 말은 매일 녹음된 음성으로만 똑같이 들어왔던 말이 아니던가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그러다 한 역에 이르러서, 마지막에 이런 말을 덧붙이시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떤 다른 순간이 불현듯 겹쳐졌습니다. 매일 지하철의 개찰구에서 겪는 일인데요. 제가 출근하는 역은 특히 노인 분들이 많이 이용하는 역입니다. 일반 교통카드가 아닌 노인 분들이 사용하시는 교통카드는 개찰구를 통과하면 “행복하세요”라는 음성이 흘러나오는데요. 그러면 그분들이 한 번에 개찰구를 통하면서 모든 개찰구에서 녹음된 여성의 음성이 “행복하, 행복, 해, 행, 행복하세, 행, 행복, 행복하세요, 행복하세요...” 하며 돌림노래처럼 동시에 쏟아져 나와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그 “행복하세요”라는 소리를 들으며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기관사님의 방송을 듣고서 알 것 같았습니다.
무릇 행복하라는 말은 마음을 담는 말입니다. 하지만 지하철 개찰구에서 카드를 띡, 찍으면 나오는 음성은 상대의 맥락을 무시한 채 그저 몇 번이고 자동으로 흘러나올 뿐입니다. 아무런 마음을 담지 않고 그저 녹음된 말을 반복하는 풍경 속에 어떤 인간다운 축복과 아취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자주 음성이 아닌, 한 사람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있을까요?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람이 구태여 직접 입을 열지 않아도 소통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음식점에 가면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라는 점원의 말 대신 키오스크의 음성을 듣습니다. “음식 나왔습니다”라는 말도 기계의 음성으로 듣습니다. 문의가 있을 땐 상담 직원의 목소리가 아닌 ARS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덕에 사람을 마주하며 주고받을지도 모를 상처나 부정확한 소통을 예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삶을 살며 때때로 마주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풍요롭고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기계나 녹음된 음성을 듣다 보면 어느샌가부터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키오스크 뒤에 여전히 메뉴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버립니다. 지하철도 단지 선로를 달리는 고물덩어리가 아니라 제대로 승객의 안전을 살피는 사람에 의해 운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잊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단순히 사람의 목소리뿐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우리 삶을 편리하게 지탱해주고 있는 많은 자동화된 기술들 뒤에 여전히 생생히 작동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한 수고로움까지 마주할 기회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가만 보면 지하철에서 승객의 안전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종종 느낄 때가 언제인가 하면 일본 여행을 갔을 때입니다. 우리나라와 별 다를 것 없는 전철일 뿐일 텐데도 사람들이 열차의 풍경을 사진에 담고 낭만을 느끼는 까닭은, 유리창을 통해 열차를 모는 기관사의 뒷모습이 들여다보이고, 매 역마다 그분의 점잖은 목소리가 들려오고, 플랫폼에서도 승객을 안내하는 승무원을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순간에 우리가 평소 잊고 있던, 흔히 ‘아날로그틱하다‘고 말하는 소중한 풍경이 있습니다. 바로 투명하게 고스란히 보여지는 사람의 성실입니다.
비록 어느 출근길에서의 사소한 일화에서 비롯되었지만, 사람이 말할 수 있는 말은 가급적 사람의 목소리를 써도 좋겠다. 그런 생각이 스쳤던 한 주였습니다. 기계의 목소리나 일률적으로 재생하기 위해 녹음한 목소리 외에도, 지금 이 순간 한 사람의 목에서 직접 길어 올려 낸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가 타인의 무난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다양하게 들을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어쩌면 우리 일상에는 그러한 풍요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