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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시 May 27. 2024

좋은 경험 뒤에 남겨야 할 것

여운을 음미하는 방법

“여운이 많이 남는 워크숍이었어요.”


작가로서 북페어에서 첫 워크숍을 진행했던 주말, 참여자 중 한 분이셨던 A님께서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여운. 그 단어를 곱씹으며 밤에 목욕을 하는데 문득 저도 이 순간 그러한 ‘여운’ 속에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3일간의 북페어를 끝내고 돌아온 밤, 노곤해진 몸을 따뜻한 물로 씻어 내리며 욕실 안에 가득 찬 훈김 속에서 반가웠던 얼굴을 떠올리면서요. 그러고 보니 한 달 전의 북페어를 끝내고서도 똑같이 목욕을 하며 여운에 잠겼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돌이켜 보면 여운이 오래 이어지는 경험들이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 가장 여운이 길었던 경험은 3년 전 한여름 엄마아빠와 홀연히 남해로 떠났던 1박의 여행입니다. 고작 하루동안 여름의 풍경에 몸과 마음을 푹 적시고 나온 것만으로 가을이라는 다음 계절을 사뿐사뿐 통과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해가 바뀌는 무렵 떠났던 17일간의 일본 여행도 꼽고 싶습니다. 그때의 여운을 벗 삼아 한국에서의 일상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새로운 일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거든요.


특별한 순간이 지나면 보란 듯이 평범한 일상이 옵니다. 그 야속함을 뒤로하고 우리는 또 오래도록 후자의 시간을 뚜벅뚜벅 걸어가야 합니다. 황홀했던 순간에 비하면 한순간에 퍽퍽하고 건조해진 나날입니다. 하지만 좋은 경험들은 무언가를 선물처럼 툭, 떨궈두고 지나갑니다. 그 손짓이 너무도 조용해서 자칫하면 두고 간 줄도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것. 그것을 잊지 않고 소중히 알아채는 순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이 ’여운‘이라는 것을요. 평범한 일상을 다시 부드럽게 주물러 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여운이 부족한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뒤돌아서면 끝인 즐거움뿐입니다. SNS로 쇼츠를 보는 즐거움 같은 것 말입니다. 물론 그보다는 값진 즐거움도 있습니다. 친구를 만나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하는 시간이나 오랜만에 나를 위해 차린 치킨과 맥주 한 상 같은 것 말입니다. 우연히 발견한 좋은 책, 주말에 보러 간 영화도 깊은 감명을 남깁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그런 특별한 순간이 멀어지면서 슬쩍 남기고 간 ‘여운’이라는 도토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 가지 소중한 순간을 오래도록 천천히 곱씹을 줄 아는 시간의 여유와 마음의 지구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즐거움이라도 반짝 즐겼다가 금세 다음 즐거움으로 깡총 뛰어갈 뿐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미묘한 퀀텀 점프의 순간이나 반짝이는 아이디어는 때때로 서둘러 지나쳐버린 데서 발견되는 법입니다. 특별한 즐거움이 막을 내리면 우리는 곧바로 자리에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납니다. 다음 만남을 약속하고 다음 책을 찾습니다. 하지만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가면 보석 같은 쿠키 영상이 있다는 것, 잊고 있진 않은가요?


어떤 순간들은 너무 좋아서, 자주 곁에 둡니다. 7일 중에 나흘 내내 친구들과 만나는 약속을 잡기도 합니다. 친구와 만난 하루는 평범한 일상보다 살짝 더 특별하고 소중해 가능하면 오래오래 곱씹고 싶습니다. 껌을 단물 빠질 때까지 씹듯이요. 함께 걸었던 동네의 골목, 먹었던 근사한 음식, 방문했던 카페의 감성과 라떼의 맛, 나눴던 이야기... 이 모든 것을 그다음 날에도, 그 다다음날에도 떠올리면서 ‘그때 그 메뉴 정말 맛있었지’, ‘그때 그 분위기 정말 낭만적이었지’, ‘그때 그 하늘 정말 아름다웠지’ 하며 기쁨의 연료로 뭉근히 피워 올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날들이 쉴 틈 없이 이어지면 하나의 특별한 순간을 오래 음미할 틈도 없이 다음 순간, 그다음 순간에 주의를 홱 빼앗겨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모두 근사한 하루를 보낸 까닭에 각 추억의 유효기간이 짧아져버립니다.


예전에 이런 일기를 쓴 적이 있습니다. “권미와 먹었던 풍기 파스타는 적어도 일주일치는 곱씹어야 했는데, 그 여운이 그 다음날 소민이와 먹었던 한정식에, 또 한정식은 그 다다음날 미나와 은지와 먹은 우육면에 의해 매장당했다. 셋 다 아주 맛있었던 탓에 더욱 곤란하다. 아주 맛있었던 것들, 아주 아름다웠던 곳들, 나눴던 대화들은 그다음 날, 그 다다음날에도 이어져야 하는데...“


그때 생각했습니다. 근사한 날을 보내면 그 뒤로 며칠은 아주 밍밍한 날들을 보내도 좋겠다고 말입니다. 별 게 없어서 어제의 것이 생각나고 어제의 기쁨이 그리워지는, 그런 무난하고 무사한 날이어도 좋겠다고요. 마치 반절로 잘라 가운데에 크림치즈와 잼을 바른 베이글처럼, 평범한 즐거움-특별한 즐거움-평범한 즐거움을 행복하게 한 입 베어 먹기 위해서 말입니다.


좋은 경험 뒤에는 공백을 남겨둡시다. 비단 만남뿐만이 아닙니다. 여행도 책도 영화도 대화도 똑같습니다. 하나의 즐거움이 남기고 간 소중한 여운을 곱씹을 시간을 충분히 가진 후에 천천히 다음으로 나아가도록 합시다. 이것이 다름 아닌 요즘 떠들썩한 ‘도파민 디톡스’라는 것의 낭만적인 버전이 아닐까요?


첫 워크숍의 여운을 오래오래 곱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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