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만끽하는 리추얼, '계절 큐레이션'(3)

일상에 계절감을 새기다, 세 번째 계절 가을

by 위시

계절 큐레이션 제3편,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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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아하는 여름을 무사히 잘 보내주고, 가을을 맞았다. 여름의 녹음이 사라져 가는 걸 아쉬워할 새도 없이 서서히 단풍이 들었다. 창밖의 잎들이 하나씩 노랗게 물들 때마다, 난 마치 계단을 꾹꾹 누르며 올라가듯이 천천하고 확실하게 계절감을 느꼈다. 원숙의 단계를 눅진하게 밟았다. 가히 이 집에서 맞았던 가을은 환상적이고 낭만적이었다. 햇살이 따로 필요 없었다. 풍성하게 물든 은행나무가 늘 황금처럼 빛났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좀처럼 계절을 만끽하기 어렵다. 회사에 다니거나 학교에 다니면서 할 일에 치여 살거나 실내에 갇혀 있으며, 무엇보다 계절이 오고 자연물이 생동하는 현상을 주변 배경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겨 일일이 눈여겨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과는 별개로 계절은 묵묵히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 다른 색감과 다른 냄새와 다른 소리들을 안고 찾아온다. 그 계절에 다이빙하듯 한껏 뛰어들어 우리의 일상도 한껏 물들어 봐도 좋지 않을까? 내 일상에 계절을 녹여낼 수 있는 나만의 카테고리를 정하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 카테고리들에 '계절다운' 변화를 주는 것이다.


계절감을 쉽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오감'을 자극하는 것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계절감이라는 것은 계절로부터 느껴지는 '감각'이다. 그러니 이 감각을 조화롭게 자극해주면 계절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 같은 풍부한 무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감 중 자신의 취향과 성향에 맞게 조금 더 집중하고 싶은 감각에 주목해 보는 것도 좋다.


그리하여 계절을 온전히 만끽하기 위해 계절에 어울리는 나만의 카테고리로 일상을 색다르게 꾸며보는 '계절 큐레이션' 리추얼을 소개한다. 봄, 여름에 이어 어김없이 돌아온 '가을' 편! 들꽃과 문학의 향이 짙게 가라앉는 따뜻한 가을의 무드를 전한다.


내가 제안하는 계절 큐레이션 카테고리와 함께, 여름을 맞아 각 카테고리 별로 변화를 주거나 실행한 일상의 모습을 공유한다.


계절 큐레이션 (1) - '봄' 편 보러 가기


계절 큐레이션 (2) - '여름' 편 보러 가기




1. 들꽃 핀 책상 (노란 꽃 패브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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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쉽게 계절감을 나타낼 수 있는 인테리어 소품은 패브릭이다. 계절감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온도감과 무게감이 가장 적당한데, 패브릭의 색과 패턴이 그 느낌을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가을의 빛깔과 온도감은 딱 오후 4시 경의, 노을 지기 직전의 아직 무르익지 않은 노란 햇살의 빛깔과 따스함이다. 또한 무게감은 너무 무겁지 않은 산뜻한 느낌이 제격. 그런 옅은 노란빛과 작은 들꽃 무늬로 산뜻함을 준 패브릭으로 책상을 덮었다.




2. 자연의 색감을 닮은 테이블 (테이블매트, 그릇, 티코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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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은 베이지색을 띤 테이블매트와 밥그릇, 그리고 가을의 색감을 담은 티코스터 3종을 구매했다. 밥그릇은 서촌에서 구매한 윤관식 도예가의 그릇으로 고운 누룽지 빛깔의 무광 그릇이 안온한 느낌을 준다. 티코스터는 사진에 나온 노란 체크 외에 갈색 체크와 올리브색 스트라이프 무늬의 코스터까지 3개를 세트로 샀다. 모아 놓으면 무르익는 흙과 잎사귀의 빛깔을 닮았다. 계절감은 삼시세끼, 테이블 위에도 어김없이 존재한다.




3. 창밖의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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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인 내 방은 길가의 나무가 그대로 보인다. 그 덕에 여름에는 무성한 초록색 잎사귀를, 가을에는 황금빛으로 물든 은행나무의 절경을 볼 수 있다. 그야말로 계절을 아는 집이다. 하루하루 더 깊게 익어가는 노란 빛깔을 볼 때마다, 여름을 지나 가을 또한 실컷 음미하고 있다는 풍족한 느낌이 들었다. 이 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 중 하나로, 떠나 온 지금 이후로는 아주 낭만적인 추억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4. 새 식물, 소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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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 정음철물에서 열린 '루비마트' 팝업을 취재했을 때 선물로 받은 태피고사리. 가을에 새로 들어온 식물 친구로, 이름은 '소보루'. 소란, 소식, 소풍 등 내 성씨를 따 식물들에게 연달아 소씨 이름을 지어주고 있다. 저 둥근 형태의 잎들이 마구 모여있는 형태가 소보로 빵의 질감을 닮았고, 이 식물을 선물한 브랜드 '루비'의 이름을 가져오고 싶어서 소보로 대신 '소보루'라 지었다. 이 아이는 아직까지 잘 자라고 있다.




5. 가을 소품 Z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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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어울리는 소품들을 모아 한쪽에 ZONE을 만들었다. 반려식물 소란과 천하(천하태평의 그 천하), 그리고 독서의 계절답게 책 몇 권, 원목 사각함과 찻잔, 라탄 티코스터와 배 문진 등... 자연의 색감을 닮은 크고 작은 오브제들은 가을의 계절감에 디테일을 더한다.




6. 가을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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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엔 무척 더워서 가지 못했던 이말산을 가을이 돼서야 오랜만에 찾았다. 계절이 바뀌고 산을 찾을 때마다 늘 신기하다. 똑같은 초록이 아니다. 봄, 여름, 가을의 햇살이 다른 듯 산의 풍경과 빛깔도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 미묘한 변화를 만끽할 때마다, 계절을 제대로 차례로 건너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7. 고궁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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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가을 루틴이 있다면 바로 고궁 나들이다. 궁은 사시사철 아름답지만 그래도 가장 아름다운 계절을 뽑자면 역시 단풍이 든 가을이 아닐까. 서울 5대 궁을 모두 찍고 싶었지만 시간이 되지 않아 덕수궁과 창덕궁만 둘러볼 수 있었다. 대신 북촌과 서촌을 자주 방문해, 경복궁 돌담길도 실컷 걸어볼 수 있었던 올 가을이었다. 가을에 고궁을 둘러보는 것만큼 계절감을 물씬 느낄 수 있는 좋은 방법도 없다.



8. 가을 느낌 낭낭한 카페에서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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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천 근처의 롯지190. 창밖으로 보이는 가을의 정경을 감상하기 위해 작업거리를 들고 찾았다. 집과 그리 멀지 않은 카페인데 왜 그동안 몰랐는지! 창문이 그 자체로 화폭이 된다. 마치 글을 쓰는 뉴요커가 된 것 마냥, 카페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응시하며 작업하는 건 꽤나 로맨틱했다. 나뭇잎의 색이 변하는 가을에는, 그 어느 때보다 창밖을 내다볼 수 있는 카페에서 작업하는 게 더욱 특별한 일이 되는 것 같다.




9. 바우터 하멜 플레이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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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내내 푹 빠져있던 플레이리스트. 바로 유튜브 채널 <Ode Studio Seoul>의 'Wouter Harmel'의 곡만 모아놓은 영상이다. 어떤 플리에 그렇게까지 꽂혀본 게 처음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저작권 문제로 삭제된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래도 여전히 나의 가을을 낭만적으로 물들여 준, 감사하고 애정 어린 플리다. 가을에 한창 뉴욕에 가고 싶다는 꿈이 생겼는데, 그 꿈을 더욱 북돋은 플리이기도 하다. (정작 그는 네덜란드 출신이지만)




계절감을 느끼는 건 단순히 아, 가을이다~ 하는 기분을 만끽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시간과 함께 걸어가기 위함이다. 계절이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바쁘게 살다 보면 금방 한 달이 가고, 반년이 가고 1년이 지난다. 시간이 마치 나의 멱살을 끌고 가는 것 같은,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속도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시간의 흐름을 주체적으로 들여다 보고, 시간의 흐름이 주는 아름다움과 그 속에 녹아있는 빛나는 순간들을 만끽해 봐야 한다. 분명 계절을 의식하는 일상과 그렇지 않은 일상은 다를 것이다. 비유하면 '필터' 같은 거다. 별 볼 일 없는 사진에 필터를 끼얹으면 세상이 달라 보이듯, 우리의 일상에 '계절감'이라는 필터를 씌워보자. 분명 다르게 보일 것이다. 난 지금도 한창 가을을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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