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겨울을 지나는 분들께
취준 시기를 겪으면서 처음으로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세상의 모든 청년들이 그렇듯 자신의 짐이 가장 무겁고 힘들게 느껴지기에, 누군가가 희망의 손길을 내밀어 줬다면 취준 시기가 이토록 힘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취업준비를 했던 작은 단칸방에서 눈물을 훔치면서, 추운 겨울이 지나 봄을 맞이했을 때 내가 겪었던 아픔을 지나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이 악물고 취준을 이겨내고, 누군가가 나와 같은 아픔을 겪을 때 희망의 손길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 주변 그 누구에게도, 가족에게도 하지 않았던 나의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나는 입시에 실패했다. 가고자 했던 대학에 가지 못했고, 대한민국의 많은 수험생들이 ‘좋은 대학만 가면 인생이 풀린다’ 라고 교육을 받기 때문에 내 인생은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열심히 살았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으면 그 다음 단추를 잘 끼워 맞춰서 옷 구실이라도 할 수 있게 만들어 보려고, 친구 관계도 열심히, 대학 생활도 열심히, 공부도 열심히.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한 평범한 노력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처럼 가끔은 술도 먹고, 좋은 음식도 먹으면서 좋은 구경을 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잘 되지 않고, 외벌이로 두 자녀를 키우는 어머니는 나에게 학자금 대출을 부탁했다. 당신은 이 얘기를 하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자식들에게 모든 걸 해주고 싶었지만 해줄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은 내가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이다.
주말이나 방학이 되면 이른 새벽 인력사무소를 찾아가기도 하고, 부모님 몰래 야간 택배 상하차를 하기 위해 밤 9시에 집을 나선 적도 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가까운 학원에서 고등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쳤고, 돈이 없어 친구 자취 방에 몇 달간 얹혀 살기도 했다.
모순적이게도 특별한 경험은 욕심부려 하고 싶었기에 교환학생을 떠나기로 했다. 부모님이 빚까지 져가며 보내 준 싱가폴에서 정말 많은 경험을 했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일상을 보면서, 한국에 돌아와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크게 들었다.
교환학생에 돌아와 곧장 변리사 시험 준비를 했다. 대학 생활 중 가장 크게 매진 했던, 한창 커가고 있는 학회 활동을 떠나 난데없이 고시를 준비한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물음표와 조롱 섞인 응원이었다. 물론 진심으로 날 응원해준 친구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지인들의 ‘어디까지 하나 보자’라는 반응을 애써 장난으로 맞받아치곤 했다.
열심히 했지만 고시를 하기에 나는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었다. 변명하고 싶지 않다. 나는 끈기 없는 사람이었고, 내가 예상했던 결과가 잘 나오지 않자 내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가장 무서웠던 건 이 시험을 포기 했을 때 손가락질 할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아버지에게 고시를 그만두겠다고 처음 얘기 했을 때, ‘이거 하나 제대로 못 하면서 앞으로 뭘 하고 살겠냐’는 얘기를 듣고 상처를 많이 받았다. 물론 지금 돌아보면 진심으로 날 걱정하는 마음에 하신 말씀이었지만… 나는 왜 스스로 깊이 고민하고, 내가 가장 많은 생각을 하고 결정 했을텐데 이런 질타를 받아야 할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자존감이 바닥인 상태에서 시작한 취업 준비는 지옥 그 자체였다. 사실 취업준비가 유난히 고통스럽고 잔인한 이유는 물질적 고통보다 심리적인 고통이 크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나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더 쉽게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가장 슬픈 건 나조차도 내 자신에게 등을 돌린다는 것이다. 남들이 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든 내 자신 스스로를 응원해줘야 할 시기일 텐데 말이다.
내가 처음 취업준비를 시작했던 곳은 서울시 마포구 공덕역 근처 빌라 1층의 3평 남짓한 작은 단칸방이었다. 방이 너무나 좁아서, 방 끝에서 몸을 눕히면 머리맡에 신발장이 닿는 곳이었다. 이 방에 있을 때 정말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한미약품 서류를 합격한 후 방에서 AI 면접을 보는 날이었다. 당시엔 AI 면접이 일반화 되지 않던 시기라 특별한 가이드가 없었는데, 스터디 룸을 빌릴까 하다가 자취방에서 면접을 보기로 했다. 오후 두 시에 시작한 면접이 15분쯤 지났을 까, 화면에 나오는 질문에 답하려고 하는 순간 쾅쾅 소리와 함께 한 남성의 고함이 들렸다. 무시하고 면접을 이어가려는 순간, 계속된 고함에 결국 현관을 열어볼 수 밖에 없었다. 문 앞에 서있던 건 술에 만취해 있는 취객이었다. 몇 번의 실랑이를 한 뒤 잘못 찾아왔다는 그 사람을 돌려보냈다. 다시 화면 앞에 앉았을 때는 면접 답변이 시간이 초과되어 다음 항목을 진행중인 상태였다. 정신이 반쯤 나간 채 면접을 끝내고, 얼마 간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멍을 때렸다. 그러고 하루 종일 엉엉 소리 죽여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오피스텔에 살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스터디 룸을 빌렸다면 면접을 잘 볼 수 있었을까, 내가 한 잘못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탓할 사람이 없어 스스로만 자책했다. 면접 결과는 탈락이었지만 내가 면접 중에 그런 일을 겪었다는 사실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원했던 기업에 몇 번의 탈락을 겪고 난 뒤, 문득 학창시절 입시 때가 생각 났다. 나는 이렇게 두 번째, 세 번째 단추도 잘못 끼우는 구나, 내 인생을 그다지 별 볼일 없는 인생이었구나. 하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가득했다. 공덕역 앞에는 경의선 숲길이 있는데,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휘적휘적 길을 걷곤 했다. 산책하는 귀여운 강아지들, 웃고 있는 연인들, 달리기 하는 사람들,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나만 빼고 행복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자기 연민이 지독하던 시기였다.
한국 사회는 현실적이어서, 사회가 바라는 기준을 충족하는 것이 사람들의 인생 목표가 되곤 한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어린 청년들이 겪는 첫 번째 관문이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은 두 번째 관문 앞에 서있다. 어떤 회사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지, 여러분 손으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여러분들 중 누군가는 자신이 ‘흙수저’이고, 그렇기 때문에 취업 준비도 더 힘든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금수저가 아니기에 당연히 흙수저이지만, 나는 부모님께 정말 좋은 흙을 받았다. 깊은 뿌리를 내려 타인에게 의지가 되는 큰 나무를 세울 수 있는 양분의 흙. 많은 사람들의 자양분이 되어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흙을 받았다. 이런 흙을 주신 부모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우리는 모두 흙수저이다. 겨울을 지나 언 땅이 녹으면 그 흙 위에 아름다운 꽃이 핀다. 밤이 아무리 길어도 새벽은 오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