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는 등교하면 우선 통지반(통합교육지원반)에 가방을 두고 원반(수지가 소속된 원래 반)으로 이동한다. 수업은 과목에 따라 원반에서 받기도 하고 통지반에서 개별 학습을 하기도 한다. 클로이도 통지반 소속이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우연히 클로이가 수지랑 같은 통지반에서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오드리는 "네가 왜 이 반에 있어?" 하고 물었다. 린다가 수지랑 클로이가 한 반이라고 했을 때 당연히 원반을 말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클로이는 입을 삐쭉하며 "그냥요." 했다. 오드리는 그 질문이 실례라는 걸 깨닫고 더는 묻지 않았다.
하교 후 수지 혼자 나오는 날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둘이 싸운 게 아니라면 대개는 클로이가 결석이나 무단 조퇴를 한 날이다. 초6 때도 툭하면 학교를 땡땡이치고 로지네에 왔었다. 클로이는 교실에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가는 걸로 유명했다. 언제 어디로 갔는지 몰라 담임이 경찰에 신고를 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는 모두 클로이 스스로 오드리한테 털어놓은 것이다. "경찰이 눈앞에 나타나서 문득 정신을 차렸는데, 제가 낯선 아파트 벤치 같은 데 앉아 있는 거예요. 어쩌다 거기까지 갔는지는 생각이 안 나요. 교실에 있는 게 너무 답답해서 무작정 나간 건 기억나요." 오드리는 "어머 정말?" 하며 놀라서 듣다가 남 얘기인 듯 덤덤한 클로이의 표정에 또 한 번 놀랐다.
클로이의 돌발 행동이 계속되자 교장은 등하교 시 보호자가 동행할 것을 요청했다.
오드리는 하교 시간에 딸을 데리러 온 클로이 엄마와 만났다. 보통 문제 학생 뒤에는 문제 부모가 있다고들 한다. 순하고 평범한 인상의 클로이 엄마는 그 말과 거리가 멀었다. 혹시 수지의 활보선생님이냐며 먼저 아는 척을 해왔고 클로이에 대한 궁금증도 풀어주었다. 클로이 엄마는 초6이 될 때까지 딸한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외면했다고 한다. 학교를 자주 빠지고 밥 먹듯 거짓말을 해도 아직 어리니까, 크면 나아지겠지, 라며 스스로를 속였다고.
"그러다가 수지 일이 터졌어요. 수지를 꼬드겨 재미로 물건을 사는 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현금까지 요구한 거예요. 일이 커지니까 다른 아이들은 하나둘 손을 뗐는데 클로이만 끝까지 그랬다는 거죠. 결국 담임선생님이 알게 되어 문제 제기를 한 거죠."
여기서 클로이 엄마는 말을 멈췄다. 오드리는 힘들면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저는 원인제공을 한 수지가 잘못이라고 주장했어요. 징계를 피하려면 엄마인 저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죠. 그런데, 그런데 수지 엄마는........ 애들끼리 놀면서 일어난 일이라고 없던 일로 해줬어요."
그녀는 그 일 이후 바로 직장을 그만두고 클로이와 병원에 가서 상담 치료도 하고 바우처카드를 받기 위한 검사도 하였다고 했다. 그렇게 통지반도 들어가게 되었다고. 자식을 둔 엄마라면 누구나 클로이 엄마의 고백 앞에서 숙연해질 것이다. 클로이 엄마의 화장기 없는 얼굴이 해사해 보였다.
클로이는 수지를 맘대로 조종하는 데서 만족을 느끼고, 수지는 자신이 이용당한다는 걸 모른다. 클로이가 써먹는 방법 중 제일 고약한 것은 수지와 놀아줄 듯 놀아주지 않는 것이다. 하교 후에 만나기로 해놓고 말없이 사라져 버린다. 한번 약속을 하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 하는 수지는 의문에 휩싸인다. 같이 놀기로 해놓고 왜 오지 않는지. 꿈에도 클로이가 거짓으로 약속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학생들이 모두 떠나고 운동장이 텅 빌 때까지도 수지는 클로이를 기다린다. 수지는 "클로이야, 언제 와?" 하는 카톡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날리며 클로이의 답장만 기다린다. 날이라도 추우면 그런 처량함이 없다.
그럴 때 수지의 기분은 3단계로 변하는데, 일단은 삐진다. 그다음은 초 단위로 짜증을 낸다. 예를 들면 오드리가 서있어도 짜증 앉아도 짜증을 내는 식이다. 오드리는 엉거주춤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렇게 수지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라치면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하는 자괴감이 몰려온다. 수지의 마지막 수단은 울음이다. 그 울음은 이제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는 뜻이다. 한번 울음이 터지면 린다도 어찌할 수 없다. 야단을 쳐도 듣지 않는다. 린다는 "그럼 맘대로 해!"하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수지의 울음소리는 더 격해지고 오드리는 두통약 생각이 간절해진다.
한 번은 린다가 참다못해 수지를 호되게 야단쳤다.
"이제 카톡도 전화도 하지 마! 걔는 싫다는데 왜 자꾸 연락해?"
"클로이 아니면 누가 나랑 놀아줘?"
수지의 그 말에 린다도 옆에서 듣고 있던 오드리도 말문이 막혔다. 수지는 밀당 같은 거 모른다. 그냥 클로이랑 놀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수지는 다 안다. 느끼고 있다. 자신이 뭔가 다르다는 걸. 통지반이며 활보가 필요하다는 사실보다 실제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확한 인식이기에 더 아프다.
그 순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은 착한 수지를 울게 만든 나쁜 X 클로이에 대한 분노다. 그럼에도 지금 당장 클로이가 나타나 주기만 한다면 다 용서해 줄 수 있다는 비굴한 마음이 한편에 깔려 있다!
그렇게 제 기분대로 행동하던 클로이가 참회하는 불효자처럼 수지한테 찰싹 달라붙는 시기가 있다. 자기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무슨무슨 데이 같은 날이 그렇다. 클로이는 자기 생일을 무슨 연중행사 치르듯 빌드업에 심혈을 기울인다. 생일 전 수지에 대한 친절함은 평소와 다르다. 수지의 혼을 빼놓을 듯이 친한 척한다. 그리고 매일매일 자기 생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수지한테 주입시키며 갖고 싶은 걸 이야기한다. 그러면 수지는 엄마를 졸라 클로이가 요구한 생일선물을 그날그날 주문한다. 클로이를 위한 선물상자는 점점 커진다.
드디어 당일이 되면 클로이는 환성과 함께 큰 선물상자를 받고는 다른 약속이 있다며 서둘러 가버린다. 수지한테 사탕 하나라도 생일턱을 내는 법은 없고 수지 생일이 언제인지도 관심 없다. 수지는 선물상자 덕분에 클로이가 조금이라도 더 자기 집에 머무른다는 사실이 기쁠 뿐이다. 오드리는 수지가 웃고 있는 사진을 찍어 린다한테 보고한다. 린다는 돈은 좀 썼지만 딸이 기뻐하는 걸로 됐다고 생각한다. 생일 전후로 수지를 대하는 클로이의 온도 차가 어찌나 선명한지 지켜보는 오드리가 민망할 지경이다.
수지가 좋아하는 인형 캐릭터는 '쿠로미'다. 검은 해골 모양 모자를 쓰고 있는 그 인형을 좋아해서 필통을 비롯하여 곳곳에 쿠로미 스티커가 붙어 있고, 가방에도 서너 개의 쿠로미 키링이 달려 있다. 쿠로미로 인형놀이 하는 것도 좋아한다. 수지의 울음이 잦아들 즈음 오드리는 집에 가서 인형놀이를 하자고 꼬신다. 오드리는 클로이를 대신할 수만 있다면 혼을 갈아 넣어서라도 재미있게 놀아주고 싶었다. 수지는 슬그머니 오드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집으로 와서 인형이란 인형은 모두 꺼내서 놀이를 시작한다. 쿠로미는 간호사가 될 수도 있고 유치원 선생이 될 수도 있다. 수지는 말이 필요 없는 환자나 원생 역할을 맡고 오드리가 일인 다역을 맡아 쉴 새 없이 떠든다. 수지가 원한다면 목이 쉬어도 좋다.
인형놀이를 하느라 수지의 카톡이 멈추면 이제 클로이가 급해진다. 클로이는 "수지야, 뭐 해?" 하고 카톡을 보내 수지를 떠본다. 수지는 무언가에 몰두하면 다른 데는 신경 쓰지 않는다. 감히 자기 카톡을 씹다니, 용납이 안 되는 클로이가 몇 분 후 수지네 문을 두드린다. 수지와 오드리가 사이좋게 노는 걸 보고 위기를 감지한 클로이는 수지의 관심을 되찾으려고 용을 쓴다. 클로이는 통지반 아이들 이름을 들먹이며 "걔가 너 욕하던데?" "어제 네 필통 만지던데?" 하며 없는 말을 지어내 수지를 자극한다. 오드리도 지지 않고 더 열심히 의사 역할을 한다. 수지는 다행히 환자 역할에 몰입하고 있다.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다.
“나 간다.” 클로이는 마지막 수단을 꺼내든다. 클로이가 집에 간다는 말은 수지한테 제일 무서운 협박이다. 클로이가 집에 간다고 할 때마다 수지는 좀만 더 놀자며 매달렸다. 그런 수지가 눈도 뜨지 않고 “응" 했다. 오드리는 속으로 '예쓰!'라고 외쳤다. 클로이는 문을 꽝 닫고 나갔다.
클로이가 나가자 긴장이 감돌던 수지네 집은 비로소 차분하고 편안해진다. 오드리는 그제야 제대로 숨을 쉬는 것 같다. 다음날이면 클로이는 사방팔방 떠들고 다닐 것이다. 자기 엄마, 수지 엄마, 통지반 선생님, 미술학원 선생님 등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들고 활보쌤이 자기랑 수지를 괴롭힌다고 말이다. 실제로 그들은 사태파악을 하려고 린다한테 전화까지 했다. "오해를 풀려면 선생님들을 한번 만나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린다가 조심스럽게 권했지만 오드리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클로이가 저에 대해 뭐라고 하건 반응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수지의 활보지 클로이의 활보가 아니니까요."
수지는 입만 열면 "놀자 놀자."하고 클로이는 "놀아주면 뭐 줄 건데?" 하고 거드름을 피우지만 막상 클로이는 단 몇 분조차 무언가에 집중하지 못한다. 클로이한테는 세상 모든 게 따분할 뿐이고 그 일상의 지루함을 거짓말이나 이간질 같은 걸로 풀려고 한다. 아무것도 안 해도 수지는 클로이와 같이 있고 싶어 한다. 둘이 같이 있어도 별 거는 없다. 그냥 각자 폰을 갖고 논다. 클로이는 폰으로 전화하고 카톡 하고 남의 말을 옮기는 게 놀이의 전부다. 그러다가도 둘이 무언가 죽이 맞으면 킬킬거린다. 별 얘기도 아닌데 요란을 떨며 까르르 웃는 걸 보면 또래 소녀들만의 감성이 통하는 것 같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오드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뇐다. 클로이를 대하는 원칙도 잊지 않으려 한다. 첫째 클로이와 감정적으로 대립하면 안 된다. 설득하거나 따지거나 논쟁하려 하면 안 된다. 어차피 못 이긴다. 둘째 개인적인 관계를 만들지 않는다. 잘해 주려다 상처 입는 건 수지 하나로 족하다. 따뜻하게 대하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셋째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한 항목이긴 하다. 어떤 경우에도 수지를 보호하는 게 우선이다.
그렇게 단단히 빗장을 걸었어도 클로이를 볼 때마다 오드리는 양가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연민과 경계의 마음이 동시에 피어오르는 것이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버린 게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