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에서 클로이 얘기를 해볼까 한다.
클로이는 수지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있는 아이다. [나는 활보다 1 ] '15화 편의점 갈 사람?'편에 나온다. 초6 때 수지와 짝꿍이 되어 중학교까지 이어지고 있다.
"수지 반에 클로이라는 친구가 있어요. 그 아이를 선생님이 잘 좀 지켜봐 주세요......"
린다는 클로이를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린다의 조심스러운 발언은 여중생이 처음인 오드리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린다는 클로이에 대해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초면인 오드리 앞에서 자제하고 있었다. 오드리는 도티한테 못되게 굴었던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며 클로이를 상상해 보았다.
오드리는 수지 일을 시작하고도 며칠이 지나도록 클로이를 구경하지 못했다. 마침 수지와 클로이 사이는 냉전 중이었다. 수지는 클로이와 사이가 안 좋을 때 심술이 더 극에 달했고, 그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오드리가 감당해야 했다. 린다는 수지가 안정을 찾으려면 클로이와 다시 잘 지내는 방법뿐이라고 했다. 도대체 클로이라는 애는 어떤 인물이기에 천하의 수지를 좌지우지할까. 오드리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그런 어느 날 드디어 수지가 클로이의 손을 잡고 오드리 앞에 나타났다.
그즈음 오드리는 수지와 만나는 장소를 따로 정해 두었다. 학생들 왕래가 적은 후문 옆 벤치였다. 통지반(통합교육지원반) 앞에 서 있으려니 불편하기도 하고 수지도 싫어하는 눈치여서 대기 장소를 바꾼 것이다.
클로이랑 함께 오는 수지의 얼굴은 싱글벙글이었다. 수지한테 저런 표정도 있었나 싶을 만큼 밝았다. 역시 저 나이에는 친구가 최고구나. 웃는 수지를 보니 오드리도 기분이 좋아졌다. 수지를 웃게 만드는 주인공을 얼른 보고 싶어 오드리는 다가오는 클로이를 응시했다.
"어?" 오드리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고, 클로이도 눈을 크게 떴다. 클로이 입에서 "혹시 로키?" 소리가 나왔다. 그렇다. 두 사람은 구면이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로지가 아직 살아있을 때로 돌아간다.
오드리는 평소처럼 로키를 산책시키고 있었는데 놀이터에 있던 웬 여자아이가 "로키야!" 하면서 달려들었다. 그리곤 오드리한테 깍듯하게 인사하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로키랑 같은 동에 살아요. 로지 할머니도 알아요. 주말에 제가 로키를 산책시키기도 해요." 오드리는 '세상에! 이렇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애도 있구나' 하고 신기해했다. "저는 개를 너무 좋아하는데, 엄마가 개 알러지가 있어서 개를 못 키워요. 그래서 로키를 예뻐하는 거예요." 어찌나 야물딱지게 말을 잘하는지! 그런데 그날은 평일 오전이었다. 학교는 왜 안 갔냐니까 엄마가 자기 말을 안 들어서 시위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때 좀 쎄하긴 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가서 클로이 얘기를 했더니 로지 반응이 떨떠름했다. 애가 똑부러지더라는 오드리의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하루는 초인종이 울려서 나가 보니 클로이가 서 있었다. 그날도 학교를 안 가고 로지네로 온 것이었다. 그때 오드리는 거실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클로이가 "근데 아줌마는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하고 물었다. 오드리가 "응 나는 로지할머니 일 도와주고 로키 산책시키는 사람이야." 했더니 클로이는 "아, 가정부?" 했다. 그리곤 곧바로 로지 침대 옆에 찰싹 붙어서 애교를 떨었다. 로지가 구워주는 만두도 먹고 로키와도 잘 놀았는데 오드리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졌다. 오드리는 클로이가 가정부? 할 때의 묘한 어감이 거슬렸지만 아이 말에 예민할 필요가 있나 싶어 머리를 흔들었다.그런데 괜히 예민한 게 아니었다. 클로이가 가고 난 뒤 로지가 말했다. "애가 참 맹랑해요. 선생님한테 일을 많이 시키라지 뭐예요." 오드리가 클로이한테 "로지할머니는 착해서 일을 많이 안 시키셔."라고 했더니 안방에 있는 로지한테 가서 바로 그런 말을 한 것이다. 남의 말을 할 수는 있지만 한 공간에서 이 말 저 말 바꿔가며 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것도 초6 여자아이.
그것과 관련하여 나중에 생긴 에피소드 하나 더.
중학교 지킴이 아저씨는 항상 교문 앞 횡단보도에서 교통 지도를 해준다. 오드리는 길을 건널 때마다 인사를 하였는데 클로이가 "아 좀 모른 척해요!" 하고 짜증을 냈다. "왜? 아저씨가 고맙잖아" 그랬더니 "뭐가 고마워요? 돈 받고 하는 건데" 했다. 나이가 어려도 직업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있다. 하지만 클로이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아이는 못 본 것 같다. 클로이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있는 걸까. 로지한테 일을 많이 시키라고 속닥거릴 때처럼 클로이는 지금 수지를 조종하고 있다.
클로이는 로지를 할머니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할머니 혼자 아프신데 언제라도 필요하면 저를 부르세요, 했다. 로지는 오드리의 정기적인 방문조차 부담스러울 만큼 체력이 딸렸지만, 아무 때나 들이닥치는 클로이를 거부할 용기가 없었다. 마음 약한 로지는 클로이가 오면 간식도 주고 용돈도 주고 하였다. 그 재미로 클로이는 수시로 로지네를 들락거렸고 괜찮다는데도 굳이 로키를 데리고 나갔다. 고마운 마음에 수고비를 준 게 화근이었다고 로지는 후회했다. 그러다 한 번은 친구가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고 하여 오만 원이라는 큰돈을 클로이한테 빌려주었다. 결과적으로 그 돈은 못 받았지만 로지는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클로이가 더 이상 로지를 귀찮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드리는 그렇게 두세 번 클로이의 얼굴을 본 게 다였고 로지가 죽은 뒤로는 까맣게 잊었다. 본능적으로 삭제했는지도 모른다.
이것도 인연일까.
클로이는 다시 오드리 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수지의 단짝친구로.
서로를 알아본 순간 오드리와 클로이는 동시에 소리를 지르고 반가워했다. 클로이는 로지가 죽은 걸 알고 있었고, 로키는 이따금 로지 아들과 산책하는 걸 봤다고 했다. 오드리가 로키를 보고 싶어 하니까 다음에는 사진을 찍어주겠다고도 했다. 오드리는 로지와 로키를 기억하고 얘기를 나눌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점점 감정이 고조되었다. 클로이는 웬만한 어른보다 말솜씨가 좋았다. 하지만 잘 쓰인 대본을 아무 감정 없이 읽는 느낌이라 얘기가 길어질수록 어색하고 낯설었다. 더구나 둘이서만 떠드니까 수지의 얼굴이 뾰로통해졌다. 오드리는 재빨리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두 아이 뒤를 따라가면서 오드리는 생각이 많아졌다. 클로이의 등장이 앞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다. 굳이 따지면 두려운 마음이 컸다.
걱정과 달리 클로이는 오드리한테 예의 바르게 굴었다. 클로이의 목적은 오드리를 독점하는 것이었다. 자기는 없는데 수지한테만 활보가 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셋이 이동할 때 클로이는 오드리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걸음이 느린 수지가 자꾸 뒤에 처지는데도 모른 척했다. 오드리는 걸음을 멈추고 수지를 기다렸다가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걷다 보면 어느새 또 오드리 옆에는 클로이만 있었다. 클로이는 쫑알쫑알 쉬지 않고 떠들었고 그중의 절반이 수지에 관한 험담이었다. 그러나 오드리가 맞장구를 쳐주지 않자 이내 시들해지고 만다.
클로이가 결정적으로 오드리한테 삐친 것은 가방 때문이었다.
수지와 클로이는 같은 미술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원래 수지 혼자 다녔는데 클로이가 자기도 다닌다고 엄마를 조른 것이었다. 미술학원 때문에 월수금이면 싫어도 클로이를 봐야 했다. 오드리는 하교 직후 곧바로 수지 가방을 받아주기 때문에 수지는 빈손으로 학원에 올라간다. 그게 부러웠던지 클로이가 자기 가방도 좀 맡아달라고 했다. 학원 수업이 끝날 때까지 오드리는 밖에서 대기해야 한다. 가끔은 카페에 가기도 하지만 커피값이 부담돼서 은행 같은 데 앉아있기도 한다. 그럴 때면 자신의 가방도 수지의 가방도 다 짐이다. 거기에 클로이 가방까지 보탤 수는 없었다. 가방은 학원에 두었다가 갖고 나오면 된다. 수지 가방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클로이 가방까지 받아줄 이유도 여력도 없었다. 오드리는 그건 곤란하다고 거절했다. 그때 싸늘해지던 클로이의 표정이라니!
그 뒤 클로이의 태도는 확실하게 적대적으로 돌아섰다.
하나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오드리가 수지를 기다리고 있는데, 클로이가 와서 "수지 아까 갔는데요?" 했다. 오드리가 제일 겁내는 건 수지와 길이 어긋나는 것이다. 오드리는 깜짝 놀라서 학교 밖으로 뛰쳐나갔다. 수지가 갔을 법한 동선을 따라 정신없이 뛰었다. 도중에 수지 전화가 안 왔으면 계속 헤맸을 것이다. 수지는 종례 후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약속장소에 오드리가 없어서 전화를 한 것이었다. 오드리는 당했구나! 생각하며 터덜터덜 학교로 돌아왔다. 클로이는 천진한 얼굴로 수지와 떠들고 있었다. 오드리의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런 아이한테 "너 왜 거짓말했어?" 하고 따질 수도 없었다. 거짓말 아니다, 진짜 간 줄 알았다, 고 우기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오드리는 수지가 무사한 걸 다행이라 생각하고 덮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