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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비아 Feb 07. 2021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주의

10년 차 뉴욕인 에세이

어제 처음으로 조단 피터슨의 연설을 유튜브로 접했다. 미국 대학들에서 "남자" "여자"라는 단어들 대신 성별을 알 수 없는 대명사들로 사람들을 가리키는 법안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가 포스트 모더니스트 학생들에게 공격을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이 되었다. 새롭게 지정된 중립적인 대명사로 부르지 않아 성소수자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면 그 경고가 누적이 돼서 법적인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안건에 반대한 사건이었다. 조단 피터슨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을 정부가 법으로 강제할 권한은 없다며 언어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대학에 주를 이루고 있는 진보주의자에게 낙인이 찍혀 교수의 자리를 위협당한 그가, 본인이 쓴 책들로 인해 인생이 바뀌었다고 찾아오는 몇몇 젊은이들을 보며 인생은 아름답다고 다시 느낀다고 눈물을 흘리며 고백하는 장면을 보니, 이런 사회적 담론에 아무 관심이 없던 나도 생각을 하게끔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먼저 나는 조단 피터슨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남자 친구한테 짧게 들은 바로는 과거에 이 사람이 남자들을 옹호하는 말을 했다가 여성들에게 남녀차별주의자라고 찍혔다는데, 사실인지 아닌지 내가 알바 아니라 생각한다. 다만 내가 오늘 알고 싶은 것은 한 사람이 본인의 신념으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없는 사회가 과연 민주주의 적인 것이냐 라는 것이다.


뉴욕은 아시다시피 성소수자들의 성지이다. 매년 열리는 게이 퍼레이드부터 해서, 음식점들은 성소수자를 지지한다는 의미로 걸어놓는 무지개 깃발을 걸어놓은 곳들이 천지이다. 패션계에서 일하는 나는 회사에 있는 남자의 90퍼센트가 성소수자이며 여성 성소수자들도 드물지 않게 접한다. 나랑 굉장히 친하게 잘 지내는 보스도 성소수자이며 난 그분을 한 인격체로 존중한다. 이쯤 되면 내가 있는 환경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성소수자와 어우러져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그분들은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존재이며 더 특별할 이유도 덜 특별할 이유도 없다.


남성,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참고로 난 여자이다. 미국에서 홀로 직장을 다니며 살고 있다. 고로 여성으로 사회생활하는 고충을 직접 겪으며, 임신하고 애 낳고 회사에 돌아오기까지 겪는 수많은 고민과 걱정들은 옆 친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매년 접한다. 또한 지하철 타다 보면 기분 더러운 상황도 겪을 수 있는데, 나 역시 아직도 기억하는 한 사건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던 중학생 시절 학원에 가려고 지하철을 탔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도 많이 없는데 한 아저씨가 뒤에 계속 달라붙더라. 엉덩이에 이상한 느낌이 났다. 어린 마음에 신문지를 돌돌 말린 게 닿았겠거니 했는데 내리면서 살짝 뒤돌아 보니 신문지는커녕 그냥 그 부위를 나한테 대고 있던 것이었다. 이 나이 먹고 그런 일을 당했으면 뭐라 했을 테지만 그땐 너무 어렸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랐다. 이렇게 나도 여성이기에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역경을 안다. 과거에 왜 여성들이 본인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했는지 알며 아직도 고쳐나가야 하는 부분이 어딘가에 남아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이제까지 살면서 겪은 일들을 이제 와서 모든 남성들을 일반화해 저격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내가 오래전 지하철에서 겪은 성추행을 오늘 내 옆에 지나가는 남성에게 뒤집어 씌워 혐오하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 위에서 여자로 사회생활하기 쉽지 않다 했다. 생각해보자. 그럼 남자로 사회생활 하기는 과연 쉬울까? 여자이기에 드는 고민이 있는 것처럼, 남자이기에 짊어지고 가야 하는 고민은 없을까? 여성들에게 피해받은 남성이 세상에 과연 없을까? 어제 다른 여성에게 성추행받았다며 오늘 나에게 해코지하는 남자가 있다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여성이 남성에게 inferior 한 존재가 아니듯, 남성도 여성에게 inferior 한 존재가 아니다. 서로 사랑하고 encourage 하며 살아가도 아쉬운 마당에 언제 이렇게 서로에게 각박해졌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성소수자 이슈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그분들의 권리를 침해할 권리가 나에겐 없으며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내가 다른 누군가를 "남자" 혹은 "여자"라고 부를 권리를 침해당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요새 미국에서는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너희 엄마, 아빠"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한다. 엄마가 두 명, 아빠가 두명일 수 있는데 왜 선생님들이 선입견을 가지고 엄마 아빠라고 이야기하냐는 것이다. 그렇게 언급하는 것 자체가 성소수자들을 offend 시킬 수 있으며 고로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고 한다. 어느 누구도 offend 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며 단 한 번도 성소수자들을 차별된 마음으로 바라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내가 선생님이라면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게 왜 잘못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다. 나는 남자를 남자 그리고 여자를 여자라고 부르는 권리를 잃고 싶지 않다. 그렇게 불리는 게 불쾌하다고 나한테 알려주면 다른 대명사로 얼마든지 부를 수 있지만 법으로 내가 쓰는 언어를 한정하는 게 우리가 그렇게 울부짖는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인지는 진지하게 묻고 싶다. 내가 이런 글을 쓴다면 남자 친구가 뜯어말린다. 요새 이런 이야기 하면 매장당한다고 말이다. 그것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 특정 소수를 비하하는 것도 혐오하는 것도 아닌 내가 내 권리를 이용해 나의 생각을 목소리 내어 말하겠다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일까? 잘못 없는 여성들을 옹호하는 것이 질타받을 일이 아니듯, 잘못 없는 남성들을 옹호하는 것 또한 질타받지 말아야 한다. 성소수자들을 차별하지 않는 것처럼 heterosexual의 권리 또한 침해받지 말아야 한다.


결국 조금만 서로 더 이해하려 하면 나아질 문제가 아닌가 싶다. 오늘 우리가 서로 한보씩만 양보한다면 내일은 오늘보다 더욱 아름다운 세상이 되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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