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차 뉴욕인 에세이
약속대로 그다음 주 월요일 어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 일찍 출근을 했다. 같이 점심 먹는 친구 몇몇 말고는 퇴사한다는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은 채 일주일이 흘렀다. 마지막 주를 남겨놓고 Wen과 Phillip에게 이메일을 썼다. 이때까지 고마웠고 많이 배우고 간다고 앞으로도 건승하길 바란다고 답장이 오지 않아도 섭섭하지 않을 이메일을 보냈다. 그다음 날인가 VP가 일하고 있는 나에게 잠시 이야기 좀 하자며 다가왔다.
필립이 내 프랜치 보스와 VP에게 내가 왜 떠나는 거냐며 이유를 물어봤다고 했다. 내가 본인과 VP 사이에서 힘들어하던걸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보스는 필립에게 이야기를 전했고 필립이 VP에게 내가 남도록 설득해보라고 한 듯했다. 자기가 힘들게 했으면 미안하다며 내가 full time으로 일하는 게 싫으면 당분간 part time으로 일하는 건 어떠냐고 물어봤다.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VP 앞에서 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말도 안 나와서 말 같지 않은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던 거 같다. 속시원히 거절했다. 이미 다른 회사에서 오라는 offer letter을 받았고 난 더 이상 여기서 일하기 싫다 했다. VP는 축하한다고 말해주었다.
다른 회사를 염두에 두고 퇴사를 결정한 건 아니었다. 패션이라는 필드 자체에 신물이나 이 분야를 아예 떠나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며 퇴사하기로 마음먹었었기 때문에 다른 회사도, 아무런 일자리도 알아보고 있지 않았던 그때 링크인을 통해 헤드헌터가 연락이 왔다. 이제 막 시작한 조그마한 회사이기에 예전 같으면 쳐다도 안 봤을 텐데 나이스 해 보이는 헤드헌터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회사에 대해 설명을 더 자세히 듣게 되었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내가 현 회사를 떠나게 되는 이유와 앞으로 내가 취직할 회사에 바라는 바를 이야기했다. 앞으로는 브랜드의 fame도 aesthetic도 상관이 없었다. 인간성이 갖춰진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의 회사가 내가 중요시하는 유일한 한 가지 조건이 되었다. 전화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고 그 다다음날 바로 인터뷰를 보러 갔다. 내가 같이 일하게 될 보스와 사장을 만났는데 두 분 역시 선한 인상으로 가족 같은 분위기라는 설명을 여러 번 듣고 난 후에야 여기서 일해도 나쁘지 않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안에 offer letter가 왔고 한 이삼일 고민 끝에 accept 했다.
VP와 이야기를 끝마친 후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필립에게 답이 왔다. 내가 떠나게 되어 아쉽다며 내 앞으로의 커리어의 행운을 빌어주었다. 마지막은 꽤나 pleasant 했다. 비슷한 시기에 떠나게 되는 다른 과의 디자이너와 같이 쫑파티 해주고 점심 먹고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직장이 마무리 지어졌다. 금요일 3시경 모두에게 인사하며 로비 문을 열었다. 다시는 이 오피스에 올 일이 없겠구나 생각하며 나오는데 섭섭하지 않았다. 시원하기만 했다.
새 회사를 막 취직하여 적응하고 있을 때쯤이었을까 VP가 잘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샘통이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한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어차피 결국에 끝은 그럴걸 왜 그렇게 나이 먹고 치사하게 발버둥 치며 몇 년간 일했나 안쓰러웠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소식들이 들려왔는데 예전처럼 세일이 좋지 않아 분위기 파악한 사람들이 서서히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결국은 오피스 마저 축소해서 이사 갔다고 한다. 무슨 욕심에서였는지 아득바득 본인 자리 지키겠다며 마음의 여유 하나 없이 일하던 VP의 마지막은, 기울어져가는 회사에서의 해고였다. 사람이 본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다. 내가 오늘 열심히 책임감 있게 일하고 사람답게 산다면 나머지 일은 하늘이 결정해주는 것이다. 결국은 오늘 하루 사람답게, 친절하게, 여유롭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