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차 뉴욕인 에세이
일 년이 찼는지 눈치채지 못한 채 정신없이 일하는 나날들이 계속되던 어느 날, 달력을 보니 일 년 하고도 몇 개월이 훌쩍 지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는 회사 분위기 때문에 일 년이 차는 그 순간 퇴사하겠다는 마음으로 견뎌냈던 순간들도 과거의 시행착오로 넘길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배울수 있는게 더있지 않을까 고민하며 한 달, 두 달 더 보내던 날들이었다. 어느 시즌 때와 마찬가지로 중국 공장에 재품 확인차 가봐야 하는 시기가 왔다. 작은 디자이너 브랜드인 만큼 대기업들에 비해 자본이 넉넉하지 않았기에 디자이너 한 명 PD 한 명만 갈 수 있었다. 어시스턴트였던 나는 당연히 낄자리가 없었어서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프랜치 보스가 본인이 가기 싫었던 것인지 나에게 갈래라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처음에는 갈까 고민도 했지만 한번 가기 시작하면 매번 내가 가야 할꺼같았다. 미국과 중국 사이 긴 시간 비행을 해야 하는데 제일 싼 비행기를 매번 알아보고 가야 하는 것을 고려해봤을 때 그다지 탐탁지 않은 조건이라 있지도 않은 비자 문제를 들며 나는 안됄꺼같다라고 말했다.
프랜치 보스가 중국에 가 있는 사이, 필립은 어느 때와 다름없이 막바지에 디자인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두 번의 샘플들을 봤으면서도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것이 아니었다며 왜 이런 쪽이 되었냐고 성질을 내는데 옆에서 짜증 나기 그지없었다. 그 자리에 VP와 나 둘이 있었는데, 전까지 보스와 사이가 좋아보이던 VP가 보스가 없으니 필립 앞에서 잘못을 그녀의 탓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당시 나에겐 이런 경험이 꽤나 충격적이었다. 어른이라면 당연히 인성도 갖춰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나에게 대놓고 무례하게 대하는 건 둘째 치고, 같이 일하는 동료를 뒤에서 비판하는 모습들을 공공연히 목격하며 이 회사의 문화는 정말 toxic 하다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VP와 상의 끝에 뒤늦게 디자인을 변경하여 중국에 있는 보스에게 전달해주는 2주간의 과정을 마치고 보스가 돌아왔다. 무슨 일 있었냐는 듯 VP와 보스는 둘도 없는 친구의 모습을 하고는 이 모델은 털이 많아서 어쩌녜 어떤 모델은 냄새가 나녜 본인들의 조카뻘 되는 어린 모델들을 비하하는 코멘트들을 마구 날리며 본인들은 패션계의 넘사벽 쿨녀들인 양 웃고 떠들었다.
그 둘은 파리에서 일하다 왔다는 사실만으로 근거 없는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것과 인성이 바닥이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그다지 공통점이 없었다. 패션 스타일뿐만 아니라 디자인 스타일에도 차이가 있었는데 덕분에 중간에서 개고생 하는 건 나였다. 보스가 이런 식으로 하래서 디자인하고 mock up sample을 만들고 있으면 VP가 어깨 넘어 옆 보더니 답답하다는 눈빛으로 이게 뭐냐며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보스가 와서 뭐 하는 거냐며 틀렸다 이야기한다. 중간에서 참다못해 너네 둘이 먼저 의견을 맞추라 건의도 했지만 결국 윗사람들의 굽히지 않는 각기 다른 비전은 밑에 사람들이 감당해야 하는 일감인 것이다. 내 보스의 지시였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 잘못인 양 제일 힘없고 나약한 어시스턴트에게 갑질 하는 VP나 그런 VP 앞에서 본인 직속 부하를 이끌어주지 않는 프랜치 보스나 거기서 거기인 것들 밑에서 정신력으로 버티던 나의 몸은 서서히 나에게 그만둘때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다리에 하지정맥류가 생겼다. 나는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다리가 예쁘다 자부하며 살아왔는데,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매일이 멀다 하고 일하는 스케줄 동안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해봤자 다리가 붓는 현실을 피할 수 없었다. 밤에 배게에 다리를 올려놓고 자보기도 하고 집에서 수시로 틈만 나면 벽에 다리를 올려놓고 있었지만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다리의 핏줄을 자연적으로 다시 밀어 넣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뿐만 아니라 물 마실 시간도 아까울 만큼 쉴 새 없이 일하느라 몸이 항상 긴장상태로 있던 탓에 아랫배 쪽에 근육 문제가 생겼다. 처음에는 기분 탓인가 하며 넘기다가 계속해서 몸이 안 좋아 병원을 가보니 전문의로 보냈다. 여러 가지 검사 끝에 배밑 근육에 이상이 갔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스트레스로 몸이 계속해서 긴장해 있으면 발생한다며 다시 풀어줘야 한다고 했다. 하루에 12시간씩 일해도 쥐꼬리만큼 받는 악명 높은 열정 페이로 나는 그 비싸다는 물리치료를 일주일에 한 두번씩 받아가며 회사에 나갔다. 다리도 배 근육도 고장나 가는게 우울했지만 어떻게든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내가 정말 괜찮지 않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날이 왔는데 내 정신이 무너져가고 있음을 감지했을때였다. 이전에도 가끔 퇴근하는 길에 울거나 친구들이랑 하소연하다가 눈물이 날때도 있었지만, 그 날은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아침에 오피스에 들어와 컴퓨터를 켜는데 '내가 지금 여기에서 뭐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우리 회사 화장실에서 울면 사람들이 볼 테니 옆 회사 화장실에 몰래 들어가 변기통 위에 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거울을 보며 나 자신을 달래보기도 했지만 새빨개진 얼굴과 거센 파도같이 요동치는 감정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몇십 분을 기다려도 가라앉지 않자 홍당무 얼굴을 하고는 내 자리로 왔다. 다행히 이른 아침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이었고 내 보스는 업무량이 많은 탓에 일찍 와있었다. 내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잠시 이야기 좀 하자고 하니 고개를 돌려 내쪽을 보았다. 눈물범벅된 내 얼굴을 보더니 흠칫 놀라며 복도에 있는 클로젯 뒤로 데리고 갔다.
"저 그만둡니다. 여기서 나는 불행해요. 오늘 난 그냥 집에 가야겠어요. 일할 컨디션이 못되네요. 대신 다음 주에 패션쇼가 있으니 내일부터 바쁜 거 끝날 때까지 2주 동안 나올게요."라는 말을 끝으로 짐을 싸들고 나왔다. 모두가 출근할 그 시각 나는 눈물을 흘리며 Westvillage 쪽으로 하염없이 걸었다. 끝까지 수고했다 생각하며 내 자신을 다독이다 울고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니 진작 때려치지 않아 힘들었을 내 자신에게 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