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차 뉴욕인 에세이
일 이야기만 쓰다 보니 무슨 이력서 쓰는 거 같아서, 오늘은 내가 뉴욕에서 살면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타입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모든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비슷비슷하겠지만 뉴욕서의 나의 경험이 궁금하시다면 재미 삼아 읽어보시도록.
제1화)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당신은 숙인 벼 인가 아님 빻아져야 할 밀가루인가?
고개 숙인 벼
학력 좋고, 능력 좋은 사람은 어느 도시이던 많겠지만, 뉴욕에도 많다. 난 잘나지 않았지만, 한인 바닥이 은근히 좁아 그런지 10년 정도 살면서 친구의 친구를 통해, 모임을 통해, 아니면 우연히 만난 인연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들을 만나며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정말 잘난 사람들은 겸손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명한 기관의 변호사인 사람은 본인이 엄청난 일을 하고 다닌다 자랑하지 않고, 하버드 postdoc한 사람은 본인이 똑똑하다 떠벌리고 다니지 않는다. 본인이 나온 학교와 하고 있는 일에 pride는 갖지만,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한테 굳이 자기 자신을 sell 하지 않는다. 경제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난 개인적으로 돈이 감당 못할 정도로 넘쳐나는 사람들은 지출을 좀 해줘야 세계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어느 정도 reserve해야 하는 게 맞다고 보는데, 내가 만난 사람들의 은행 잔고를 어떻게 알겠냐마는, 적어도 옆에서 보기에 정말 능력도 좋고 경제적으로 편안한 사람들은 로렉스 시계를 디자인 별로 사모으지 않는다. 그 돈을 모아 집을 살지언정, 데이트하는데 잘 보인답시고 로렉스 차고 벤츠차 키 딱 당신 앞에 두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고개 숙인 벼들은 그렇지 않은 밀가루보다 잘난척하지도 않고 오히려 chill 하다. 남들이랑 웃고 떠들 때 제일 해박해도 바보인 양 장난칠 줄 아는 사람이 적어도 내 생각에는 진정으로 잘난 사람이다.
밀가루
갑자기 웬 밀가루인가 어리둥절하시는 분들을 위한, 제일 간단한 예시가 있다. 학창 시절 동네 친구와 나는 저녁에 한인타운 가서 둘이 부대찌개 시켜놓고 한잔씩 하는 걸 좋아했다. 그날 저녁도 어느 때와 같이 친구와 저녁을 먹고 슬슬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옆에서 빵 빵 거리더라. 옆으로 돌아보니 한국 남자가 벤츠를 우리 걷는 속도에 맞춰서 운전하고 있었다. "저기요 아까 음식점에서 봤는데, 우리랑 한잔 더 할래요?"라고 먼 거리서 이야기하려니 고래고래 목이 아프지 않았나 싶다. 나 원... 관심이 있었으면 조용하고 말하기 편한 음식점에서 말을 걸 것이지 본인이 연예인인가 차 안에서 여자를 꼬시게? 당연히 친구와 난 NO를 외치고 우리 갈길 갔다.
바로 이런 사람을 가리켜 밀가루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잘나 보이고 싶지만 실은 본인에게 자신 없는 자. 자신이 너무 없어서 벤츠로 나마 본인의 이미지를 높여보려 하는, 아주 빻아주고 싶은 밀가루이다. 이 사람은 예사다. 이 도시에서 지내다 보면 별의별 밀가루 다 보인다. 어느 듣보잡 작은 투자회사에서 일하면서 미국 드라마 Suits에 나오는 Harvey Specter인 양 양복만 입고 다니며 어린 여자만 찾는 사람부터, 온 세상 잘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양 침 튀기며 인맥 자랑하기 바쁜 사람까지, 듣다 보면 가관이다. 이 세상 모두 밀가루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세상은 넓고 그대보다 잘난 사람은 많다.
제2화) 뉴욕커, isn't it too much?
이 도시에서 살다 보면 종종 본인이 뉴욕커라는 사실에 과하게 심취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 마치 파파라치가 본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라도 하는 냥, 완벽하게 꾸미지 않으면 밖에 나가지 않는다. 꾸미는 것도 매거진이나 인터넷에서 본 어느 핫 한 유명인사를 따라 해야 하기에 하루 종일 머리가 셔츠 안에 들어가 있는 시크한 룩을 연출하려면 머리카락의 따가움 따윈 참아야 한다. 머리에 뽕을 넣기 위해서 2시간 머리에 핀을 꽂는 일을 매일 같이 해야 하며, 집에서 영상채팅을 하는 데도 매번 풀 세팅, 풀 메이크업을 해야 한다.
또 다른 뉴욕커의 유형도 있다. 내가 뉴욕에서 가지고 있는 직업, 살고 있는 동네, 살고 있는 집, 하다 못해 주위의 친구들까지 자랑스러워하다 못해 본인만의 판타지에 들어가 살고 있는 사람들. 이 뉴욕커들은 아무나 만나지 못한다. 본인 수준과 안 맞기 때문이다. 본인이 이렇게 모두가 부러워하는 뉴욕에서 뉴욕커의 삶을 누리고 있는데, 왜 그렇지 못한 사람과 엮여야 한단 말인가?
셀프케어, 성취감 다 좋지만, 질문하고 싶다. 헤이 뉴욕커, 너 지금 too much 아니야?
제3화) 외모지상주의
나는 대학교 1학년 때까지 안경을 썼다. 대학교 오기 전에 미국 시골에서 산 터라 꾸미지도 않았다. 화장도 안 하고 터프한 청바지에 안경잡이로 살다가 대학교 2학년 올라오면서 시력 수술을 하게 됐다. 난 막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호감형이다. 안경을 벗게 되면서 차차 화장도 하고 힐도 꽤나 자주 신고 다녔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깨달은 건데 내가 안경 쓰고 톰보이 여자애로 살 때와, 안경 벗고 호감형 여자애로 살 때와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근소한 차이지만 확실히 있다. 사람들이 조금 더 친절해진달까. 한 예를 들어 보자. 시력 수술 후 근처 자주 가게 된 세탁소가 있었는데, 앞에서 관리하던 사람이 미국 청년이었다. 집 근처고 드라이클리닝 할 것도 많아서 자주 가게 됐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 청년이 자꾸 예쁘다, 옷도 예쁘다, 한국 사람들은 다 너처럼 예쁘냐, flirting하기 시작하더라. 나는 그때마다 그냥 웃으면서 넘기곤 했는데, 매번 선을 지켜서 불쾌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청년이 날 잘 봐준 덕분에, 한 번씩 바느질을 공짜로 해준다거나, 가격을 한 번씩 깎아준다거나 했었다. 별일이 아니긴 하지만 내가 안경 쓰고 다니던 1학년 시절에는 전혀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이다. 지금도 모자 푹 눌러쓰고 체육복 같은 거 입고 집 앞에 나가면 있는 둥 없는 둥인데, 아무래도 디자이너다 보니 조금만 신경 쓰고 나가면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이쁘다 어디서 샀냐 칭찬부터 해서 도움이 필요할 때 offer도 더 쉽게 해 준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아니다 아니다 해도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는 부분인 거 같다. 참고로 패션디자인을 꿈꾸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패션 브랜드들은 대놓고 외모지상주의다. 외모가 예쁘고 잘생겨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본인만의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스타일이 먼저 있어야, 내가 하는 디자인도 더 compelling해진다. 여러모로 회사 생활이 편해지니 참고하시길..
생각나는 걸 긁적이다 보니 어느새 밤 10시가 돼간다. 오늘은 여기까지. 나중에 또 생각나면 이어서 올리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