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이직요괴_퇴사_최최최최최최종.txt
21년 9월, 나는 회사 알러지가 있다 라는 글로 브런치를 시작했다. 마음 한 곳에는 계속 탈회사라는 소망을 품은 채로 일과 삶에서 느끼는 것들을 종종 글로 풀어냈다. 그리고 올해, 난 드디어 직장 생활에 마침표를 찍는 사표를 냈다.
애초에 살려고 시작한 글쓰기였다. 누군가에게 힘듦을 토로하는 것은 결국 상대와 나 모두에게 또 다른 고통이었고 이를 해갈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절실히 필요하던 때였다. 글쓰기가 근본적인 상황을 해결해 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감정이 크게 올라왔을 때 마음 상태를 돌아보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렇게 글을 쓸수록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스스로 정의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첫 글로부터 2년이 조금 넘게 흘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난 역시나 별명에 걸맞게 이직을 겸해가며 직장인으로서 열심히 살았다. 행복하던 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때도 있었다. 할만하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지만 도저히 못해먹겠다는 생각도 여전했다. 다소 잦은 이직이라는 특이사항을 제외하고는 아주 평범한 K-직장인 중 한 명으로 지내왔다.
난 기술직도 아닌데 회사를 나가면 뭘 할 수 있을까? 막상 퇴사하고 나면 침대에 누워 쉬고 싶기만 하지 않을까? 사업을 해보자니 경험도 없고... 막막하다.
홧김에 결정 내리기엔 감당해야 하는 기회비용이 너무 큰 선택이다. 속으로만 상상하고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고민하며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해 본 후 도저히 안될 것 같다 싶어 꾸역꾸역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풍경이 반복됐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고비는 또다시 찾아왔다. 힘든 이유가 대체 정확히 뭘까. 물론 조직의 탓도 있겠지만 분명 내 안에도 원인이 있다.
아직 채 10년도 채우지 못한 8년 차의 직장인. 남들이 보기엔 별 어려움 없이 일하는 사람이다. 바쁘게 일하고 때론 힘들어하는 티도 나지만 뭐 그 정도야 웬만한 직장인들은 다 비슷하게 겪는 거니까. 직장 내 인간관계는 평균 이상으로 좋은 편이고, 조금 겸손 떨어 적자면 적어도 주어진 업무를 망치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회사에서 오랜 시간 버티는 게 힘들었다. 누구의 조언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결국 답은 내가 직접 찾아야만 했다.
나름의 고뇌와 고민 끝에 나온 최종 결론은 이렇다.
나는 예민한 사람이다. 외부 자극에 굉장히 민감하기에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성향이 장점으로 발휘될 때는 조직 내 미묘한 분위기 변화 혹은 누군가의 발화 의도를 빠르게 알아차린다던가, 머지않은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업무적 사건 등을 얕게나마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에너지 소모가 빠르고, 불필요한 근심 걱정까지 다 떠안고 살기 때문에 부정적인 감정에도 쉽게 휩쓸리게 된다.
한편으로는 책임감이 지나치게 높다. 책임감이 높으면 그저 좋은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를 좀먹을 정도라면 말이 다르다. 나이가 들면서 유연성이 꽤 는 덕분에 평소에는 적당히 융통성 있게 살아가지만, 유독 사회생활에서의 책임감은 도를 넘는 부담과 강박으로 다가와 조절이 쉽지 않았다. 또한 그 책임감은 오롯이 내 기준이기에 조직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해 보자면 난 머리가 클 만큼 큰 30대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다른 사람의 기대와 평가를 의식하는 데 너무 많은 마음을 쏟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쉽게 고치기 어려운 나의 성향이기도 하다. 이전에 친구가 다니던 병원에서 정신과 선생님이 해주셨다는 말씀이 떠올랐다.
온통 네모인 세상에서 세모로 살아가는 건 당연히 어려운 일이에요.
당신이 이상한 게 아니에요.
지난 8년 간 겪으며 봐왔던 회사라는 조직은 외부 자극에 비교적 무던한 반응을 보이고, 자신의 에너지 레벨에 맞춰 책임감의 정도를 현명하게 조절할 줄 아는 사람에게 적합한 환경이었다. 세모인 내가 네모에 구겨 맞추려니 들어갔다가도 튕겨져 나오는 게 당연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찌 보면 당연한 듯이 취직을 해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핑계라면 핑계겠지만, 부모님 두 분 모두 직장생활을 오래 이어오셨기에 그 외의 삶이 어떠한지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도 많지 않았다.
회사생활을 하는 어른이 되어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고 나니 이제야 다른 삶의 모양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세모와 비슷한 네모를 찾겠다고 아등바등 몸부림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미지의 세모 세상으로 떠나는 게 낫겠다는 의지도 조심스럽게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선택을 내리기까지 정말 수없이 많은 자문자답이 있었고, 대책 없는 성격이 일부 발동하기도 했다. 지난 모든 사고의 알고리즘을 글로 적어내기엔 아직 필력이 한참 부족하기 때문에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단편으로라도 적어보도록 하겠다.
이번 브런치 북에서는 직장인이라는 관성에서 갑자기 벗어나게 된 내가 이 대혼란 속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백수(=홈프로텍터)'라는 단순해진 직업 소개 뒤에 숨어있는 복잡하고 현실적인 상황들을 어찌 헤쳐나갈 것인지, 아무튼 사춘기 이후 또다시 맞은 인생의 과도기를 건너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보관하려 한다.
아 참, 혹시라도 이번이 몇 번째 퇴사인지는 묻지 말아 주세요. 이제 저도 가물가물하거든요!
* 사진: Unsplash의Junseong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