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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직요괴 Dec 18. 2023

직장인이 아니면 뭔데?

02. 꼭 회사로 날 설명할 필요는 없잖아

퇴사 후 생기는 가장 날 것의 고민 중 하나는 이것이다.


 지금의 날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육체적 존재 그 이상의 것들을 타인에게 증명해야 하는 일이 생기곤 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도록, 그리고 가능하면 내게 신뢰를 가질 수 있도록, 나를 구성하는 많은 정보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한다.


다수가 모여있는 조직에 속해있는 경우라면 개인의 신분을 증명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학생 시절엔 다니던 학교가, 직장인 시절엔 회사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재학 증명서와 재직 증명서라는 이름의 문서가 신용을 일부 책임져주는 것이다.


딱딱한 의미의 신분 증명 외에도 우리는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설명하게 된다. 이름이 무엇인지, 어느 지역에 살고 있는지, 직업은 무엇인지 등을 주로 소개하면서 말이다. 일부 직장인들은 애매하게 사적인 인간관계를 맺을 때 회사 명함을 건네며 인사하는 경우도 있다. (비즈니스 직군이 특히나 그런 것 같다) 비록 작은 종이 쪼가리 한 장이지만, 직장과 직업은 누군가의 신분과 신뢰도를 보증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고 편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냥 평범한 인간 중 하나다. 에라이 직장인 때려쳐! 하고 호기롭게 퇴사했지만, 막상 자연인이 되어버린 날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걱정이 가득한 그런 인간.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상태를 열린 가능성으로 즐기지 못하고 불안감에 조금씩 잠식되어 버릴 가능성이 농후한 아주 아주 연약한 인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30대의 일반적 궤도에서 강력 이탈해 버린 나는 호기심의 대상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아마 대놓고 묻지는 않더라도 잘 다니던 회사를(그다지 잘 다닌 건 아니지만) 때려치우면서까지 궤도를 이탈한 이유가 매우 궁금할 것이다. 앞으로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 지에 대한 후속 질문들 역시 속으로 준비해두고 있을 것이다.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무시한다고 모든 상황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만약 남들에게 당당하게 답변하지 못한다면, 그건 사실 정리되지 않은 생각과 환경에 자신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단숨에 정돈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진작에 했겠지! 내겐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난감하고 불편한 순간들은 너무나 쉽게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생각할 시간을 다 채우기도 전에 무기력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먼저 힘을 길러야 한다. 내가 생생히 살아있는 존재임을, 세상에서 쓸모 있는 존재임을 스스로 인지할 수 있도록 성취감과 효능감을 얻을 수 있는 작은 일들을 놓지 말아야 한다. 비록 그것이 돈을 버는 일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퇴사자에게 루틴은 금이다. 요즘 나의 루틴을 소개하자면 이렇다(별 거 없음).

1.
독서, 요가, 글쓰기 등 좋아하는 일의 비중을 대폭 늘려 매일 일정 시간을 각각에 할당해 두었다. 내게 당장의 금전적 이득을 가져다주지는 않더라도 삶의 의미와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기록이 더해진다면 더욱 좋다. 눈에 보이고 남는 결과물은 자주 위태롭고 간사해지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2.
일정한 수면 패턴을 지킨다. 수면 패턴은 생활 리듬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너무 많이 자거나 적게 자게 되면 리듬이 깨져 의욕도 함께 박살 나기 일쑤다. 개인적으로는 기존 업무 시간과 비슷하게 하루 일과를 시작할 수 있도록 일어난다. 출근처럼 강제된 상황이 아니기에 일어나는 게 쉽진 않지만, 우선 박차고 일어나 세수부터 하면 그다음이 조금 수월해진다.

3.
하루에 1끼를 먹든 2끼, 3끼를 먹든 끼니는 반드시 제 때 챙겨 먹는다. 그리고 가능하면 소박하더라도 성의 있게 차려 먹는다. 식사는 오롯이 나를 위한 순간이라 생각하고 소중히 여긴다.

4.
주변 환경을 깔끔하게 유지한다. 특히 정리정돈이나 청소는 결과물이 바로바로 보이는 행위이기 때문에 성취감을 얻기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게다가 깔끔한 환경은 몸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이롭다.

5.
산책, 운동, 집안일 등 몸을 움직이는 일을 많이 한다. 움직임 없이 가만히 앉거나 누워만 있으면 잡생각이 많아진다. 몸을 움직이면 잡념을 떨치기 쉬울 뿐 아니라 활력이 생긴다. 난 다행히도 평소 요가를 꾸준히 하고 있고, 또한 청소광이기에 몸이 가만히 있을 새가 없다.

(글로 쓰니 다소 빡빡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실제 내가 칸트처럼 살고 있진 않다. 자연인은 남는 게 시간이기에 모든 루틴은 유연한 조절이 가능하도록 여유롭게 짜두었다.)


이러한 루틴은 현재 회사가 빠진 나의 삶을 지탱하고 있다. 누군가 내게 정체를 묻는다면 직장인 시절처럼 한 줄로 간단히 설명하긴 어렵겠지만, 쬐금 길어진 문장이더라도 무얼 하며 사는 사람인지는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다. 루틴은 반복될지언정, 단단해져 가는 내면과 함께 방향성에 대한 고민 역시 조금씩 전진하리라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사는 문제는 지극한 현실이다. 다음 편에서는 정기적 수입이 없는 30대 생산 가능 인구의 고민에 대해서 적어보려고 한다. 휴, 정말 쉽지 않은 문제다.


* 사진: UnsplashTyler Lastov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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