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다정다감하지만 가끔 치졸한 백수 인사이더
혹시라도 글로만 나를 접하는 누군가가 지금의 백수 생활이 너무 이상적이라고 생각할까 문득 염려되어(?) 오늘은 살짝 지질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자동차를 사는 것과 퇴사의 본질이 같다'는 과거의 내 주장에 따르자면 난 정말 용기 하나만으로 외제차를, 그것도 아~주 비싼 외제차를 덜컥 구매해 버린 인간이다. 차는 기대했던 것만큼 맘에 쏙 들지만, 높은 유지비와 산더미 같은 잔여 할부금에 대한 압박감 때문인지 종종 이것이 진정 내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당연히 아시겠지만 비유입니다. 용기만으로 외제차를 살 만큼의 배포는... 최소 이번 생엔 없습니다!)
백수가 먼 미래는 둘째치고 가까운 미래조차 장담하기 어려운 가장 큰 원인은 아무래도 '돈'이다. 직장인에게 금융치료가 있다면, 백수에겐 오로지 금융폭행만이 있기 때문이다. 대책 없는 결정에도 나름 계획형 기질을 발휘해 이런저런 알바 자리까지 계산해 두었지만 사람 일이란 역시 준비한 대로 순순히 흘러갈 리 없다.
이벤트 마냥 발생하는 수입에 비해 지출은 월초, 월중, 월말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이유로 생겨난다. 처음 신용카드를 만들 때 전월 1일~말일까지 사용한 카드값을 한 번에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에 14일을 결제일로 골랐었는데 요즘은 괜히 14라는 숫자가 싫어지려고 한다. 숫자는 죄가 없는데! 나도 아는데!
씀씀이를 줄이는 것도 쉽지 않다. 퇴사 후 가장 먼저 했던 일 중 하나는 필요 없는 고정비를 파악해서 줄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줄일 수 있는 고정비가 많지 않았다. 통신비, 교통비, 보험료 등 기본적인 비용을 제외하고 나니 남는 건 몇몇 구독료를 해지하는 정도였다.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이 이렇게 많다니. 몰랐던 것도 아닌데 높아진 물가가 새삼 체감되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 나가야 하는 돈은 어쩔 수 없고 그 외 소비를 줄여보자!
마지막 월급으로 신나게 질러댄 퇴사 후 첫 번째 결제일을 뒤로하고 대망의 두 번째 카드 결제일이 도래했다. 명세서를 확인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단골 멘트가 빠지면 섭섭하다. "이게 진짜 다 내가 쓴 돈이라고??" 괜히 믿지 못하는 척 상세 내역을 눌러 결제 건을 하나씩 확인한다.
"이건 내가 쓴 게 맞고, 이것도 맞고, 이것도 맞는데... 잠깐 이건 뭐야? 이런 데서 이렇게 돈 많이 쓴 적 없는데 대체 뭐지?!"
기억에도 없고 그럴 리도 없는 금액과 결제 내역에 찍힌 낯선 상호명을 보고 순식간에 카드 복제부터 도용까지 별의별 시나리오를 다 썼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결국 내가 쓴 돈임이 쉽게 밝혀졌다. 아니 그러니까 분명히 불필요한 소비를 줄인다고 줄였는데 대체 돈이 어디서 이렇게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맨날 똑같은 옷만 입고, 혼자서는 음식을 사 먹지도 않고, 사치품엔 관심도 없는데 말이다.
그 순간 휴대폰 진동이 울려 화면을 보니 이런 푸시 알림이 떠있었다.
'다정다감한 인사이더'의 정체는 선물하기로 월 1회 이상 돈을 쓴 사람에게 선사하는 태그였다. 아, 사실 알고 있었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태그를 기획할 때엔 칭찬의 의미를 의도했을 테지만 돈 없는 백수에게 이 태그는 마치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오지라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다. 난 스스로에겐 굉장히 야박하지만 남에게 돈을 참 잘 쓴다. 오죽하면 지난번 사주를 보러 갔을 때에도(이 편 참고) 쓸데없을 만큼 정이 많다며 남한테 돈 좀 그만 쓰라고 한 소리 듣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연락하거나 살갑게 안부를 묻지 못하는 성격이라 마음을 전할 일이 생길 때면 소정의 선물이라도 함께 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또다시 돌아온다는 걸 분명히 알기에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가끔 망설이는 나를 보게 된다. 그렇다고 당장 먹고사는 데 필요한 돈이 부족한 게 아닌데도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진 수입과 지출의 무게추가 왠지 아른거려 결제 버튼을 쉽게 누르지 못할 때도 있었다. 나한테 쓰는 돈은 어떻게든 아끼겠지만 남에게 쓰는 돈까지 아끼려니 갑자기 스스로가 매우 치졸하게 느껴졌다.
간혹 미래에 어떻게 살고 싶냐는 질문을 받으면 적어도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나누고 베풀 만큼의 경제력은 갖추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대답하곤 했었는데, 그런 내가 주변인에게 그리 크지도 않은 돈을 쓰며 망설이는 순간이 오다니 솔직한 심정으로는 조금 비참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누군가 이런 옹졸한 마음을 알아차릴까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최근 넉넉했던 마음에 살짝 초조함이 일어 오는 것 같다. 예상했던 시기보다 훨씬 이르게 찾아온 느낌이라 애써 부정하고 싶었지만 이젠 아무래도 인정해야겠다. 숨기고 싶은 내 지질한 모습을 직면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기적인 수입에 익숙했던 직장인 관성을 버리지 못한 탓인지는 정확히 구분할 순 없어도, 확실한 건 이대로 가다간 다정다감한 인사이더가 순식간에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오지라퍼가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나.
* 사진: Unsplash의Clay Ba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