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구라는 남자의 사랑법
몇년 전 넷플릭스에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수리남>의 주인공 강인구(하정우 역)은 결혼 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런 맥락에서 수리남까지 가서 사업을 하게 된다. 수리남에서 강인구는 상당한 고초와 위험한 상황들을 겪으면서 용기와 기지를 발휘하는데, 그 강한 동기를 제공하는 것은 가족애이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고생하면서 지키는 가족을 얻게 되는 경위는 살짝 우스꽝스럽다. 드라마의 도입부에서 강인구가 수리남에 가기 전까지의 삶의 과정들을 압축해서 보여 주는데 그 중에 결혼을 하는 과정이 나온다. 강인구는 문득 자신의 생활이 엉망진창이라는 걸 깨닫고 결혼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는데, 결심을 하자 마자 바로 한 행동은 과거에 인연이 닿았던 여자들의 연락처를 찾아 우선순위를 매기는 일이었다. 그런 다음 그 순위에 따라 전화를 걸어 청혼을 한다. 물론 황당하다면서 거부하는 반응들이 이어지지만 그러다가 몇 번째인가 그 청혼을 받아들이는 여자가 등장한다. 그 여자(추자현 역)가 강인구의 아내가 된다.
이 장면은 나한테 상당히 인상적인 장면이었는데, 지금도 종종 생각이 난다. 이 장면은 내가 평소에 품고 있던 사랑에 대한 관념들에 반하는 측면이 있다. 아마 나 뿐 아니라 여러 사람도 비슷한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까 한다.
사랑이란,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대상이 가진 어떤 속성들이 사랑의 감정을 일으키고, 그 감정에 원동력을 얻어 이성적인 결심과 헌신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사랑이 사랑다우려면 하나의 대상에 감정이 집중되어야지 여러 대상에 분산되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닐까? 한눈을 파는 것이 본능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본능을 제어하고 온전히 하나의 대상에만 집중해야 사랑이 아닐까? 더 이상적으로는, 굳이 애를 쓰지 않아도 하나의 대상만 눈에 보이고 다른 대상에는 아예 관심도 갖지 않는 상태여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강인구가 결혼을 하는 과정은 그런 일반적인 사랑의 개념에는 잘 맞지 않아 보인다. 그는 여러 가능한 대상들을 줄세워 손쉬운 방식으로 접근한 다음 거부를 당하면 바로 다음 상대로 옮겨 간다. 상대에 대한 호감이 분명 있었겠지만 줄세우기가 가능한 상대적인 호감, 깊지 않은 감정으로 그는 결혼을 결정한다. 하지만 그렇게 결정하여 얻게 된 가족을 위한 헌신이 그 이후의 삶의 중심을 이룬다.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 생각을 일으킨다.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상대를 원하는, 그리고 상대에게만 집중되는 깊은 감정이 사랑일까, 아니면 강인구가 가족들에게 보여 준 것 같은 헌신이 진정한 사랑의 증거가 될까?
이것은 사실 정의의 문제일 것이다. 진정한 사랑과 그렇지 않은 사랑이 있다기보다는, 사랑이라는 단어로 통칭되는 다양한 감정과 사고와 행동의 방식들이 있는 것일 뿐이다. 윤리적인 믿음이나 과거의 추억과 같은 이유들로 결심하고 헌신하는 것도 사랑이고, 상대를 원하고 동시에 그 원함을 충족시키기 위해 상대에게 무엇이든 해 주고 싶어하는 마음도 사랑이고, 공감과 이해에서 나오는 잔잔한 연대 의식도 사랑일 것이다. 그밖에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많은 감정의 영역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하고, 상대에게 독점적인 관심과 헌신이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상대에게 사랑할 만한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사랑을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할 때는 상대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다른 대상과 대체 불가능한 유일한 대상으로 여겨지고, 또한 자신이 그렇게 여겨지는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어쩌면,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대상보다도 사랑 그 자체가 아닐까?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이고, 누구를 사랑하는가는 그 다음의 문제가 아닐까?
사람이란 어쩌면 생각만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존재인지 모른다.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여하는 천상의 속성들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평범한 속성들 간의 차이란 상당 부분 주관적인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어떤 대상이 특별하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여기기 쉽지만, 사실은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상대가 그 사랑에 응답을 해 주기 때문에 대상이 특별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란 기독교인들이 신의 사랑을 은총이라고 여기는 것과 비슷한 이유로, 축복이자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두 사람이 만나 특별해지는 일이다. 우리가 사랑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 하는 노력들은 호감과 존중의 이유는 될 수 있어도 사랑의 감정까지 만들어내지 못한다. 사랑에는 나와 상대의 자격 없음을 보충해 줄 마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마법 같은 축복은 불안한 것이다. 언제 사랑의 아우라가 걷히고 특별했던 대상이 평범해질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불확실성은 우리의 삶을 이루는 기본적인 모순 중 하나로 완벽한 해결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받은 축복을 소중히 여겨야 하고, 그 축복을 관리하는 책임의 상당 부분은 자기 자신의 몫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