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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밤 Jun 24. 2023

11. 비건이면서 교사로 존재하기

쓰면서 또 화가 나버렸다

페미니즘과 마찬가지로 비거니즘도 영화 ‘매트릭스’의 특정 장면에 자주 빗대어진다. 주인공 네오가 모피어스 손에 올려진 빨간 약과 파란 약 사이에서 고민하는 장면이다. 모피어스는 근엄하게 설명한다.


“매트릭스는 진실로부터 너의 눈을 가린다. (중략) 파란 약을 먹으면, 여기서 끝이고, 네가 믿고 싶은 걸 믿게 돼. 빨간약을 먹으면, 이상한 나라에 남아 끝까지 가게 된다.”


 비거니즘을 대입하자면 파란 약을 먹으면 동물로부터 분리된 먹음직스러운 고기만 보게 되지만, 빨간 약을 먹으면 그 뒤에 가려진 착취와 고통을 알게 된다는 비유가 된다.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은 용기 있게 빨간 약을 선택하지만, 빨간 약을 먹고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은 편안하지 않다. 알고 난 지금도 가끔은 ‘모를 걸’ 생각한다. 하지만 돌아가더라도 빨간 약을 선택할 거다. 불편한 진실을 떳떳이 마주한다는 건 슬픔만을 동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환희도 함께 온다.  



  작년이었다. 실과 수업을 하는데, 교과서에는 ‘좋은 고기’의 기준을 ’ 맛‘과 ‘색’, ‘칼에 붙는 정도’, ‘냄새’ 등으로 판단하라고 쓰여 있었다. 색. 송아지 고기는 연한 분홍색이 인기가 있다. 하지만 그런 색을 만들어내기 위해 송아지의 케이지에 짚을 깔지 않아 빈혈을 일으킨다. 냄새. 돼지고기는 ‘냄새가 없는 것’이 선호된다. 그 기호를 위해 마취 없이 거세당하는 건 또다시 동물이다. 좋은 고기의 기준이 고기의 특징일 뿐이라면 기호에 맞는 몸으로 만들어지기 위해 동물은 또다시 고통받는다. 좋고 나쁨은 가치판단의 영역이다.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방식을 ’ 좋은 ‘ 고기로 선택하지 않을 학생들도 있기에 ‘좋은’의 기준은 다양한 관점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물복지를 소개하는 영상을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상의 초반에는 살처분 조치로 거대한 구덩이에 들어간 수많은 돼지의 모습이 몇 초 나온다. 금세 숙연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한 학생이 당일 하교시간부터 구덩이 속 돼지들이 질렀던 비명 소리를 따라 하며 웃기 시작했다. 그다음, 다음 날도, 그 학생은 돼지의 비명 소리를 모방하며 다른 사람들의 웃음을 유도했다. 나는 당사자가 아님에도 학살을 조롱하는 그 모습을 보며 무척이나 슬펐다. 혹자는 아이들은 동물에게 더 연결감을 느끼지 않냐고 한다. 하지만 그만큼 살아있는 동물을 보고 필터 없이 ‘맛있겠다 ‘라고 말하는 아이들도 많다. ’그 입장이 안 돼 봐서 그렇지. 알고 보면 네가 더 맛있을 수도 있는데… 맛을 위해 죽이는 게 그렇게 당연한 거먼, 널 먹기 위해 죽이면 허용할 거니?’ 하도 많이 들어서 힘이 쭉 빠지고 화가 나서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상상만 한다.


 하지만 그날이 누군가에겐 기억에 남았을지도 모른다. 해가 여물수록 ‘담임 선생님의 비거니즘’에 대해 관심을 갖고 내게 비거니즘에 관해 질문하는 학생들이 늘었다. 세 명의 학생들이, 학급문고에 놓을까 말까 꽂을까 말까 수없이 고민한 ’ 나의 비거니즘 만화‘를 읽었다. 한 명은 읽다가 관두긴 했지만. 학생들이 그 책을 읽을 때 내 심장은 환희에 차 두근거렸다. 나의 영향으로 누군가가 저 책을 집어 들고 동물의 고통에 대해 알고자 한다니, 여름바람처럼 시원하게 기뻤다. 민원이 들어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지 콧노래를 부르며 계획을 세웠다.


 비건으로서의 슬픔과 환희는 학생들이 모두 하교한 후에도 찾아온다. 듣기만 해도 신경이 곤두세워지는 단어는 바로 ‘회식’이다. 친목회, 환영회 등 다양한 이름이 있지만 끝에 ‘모일 회’ 자가 붙는 것이 계획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불안해진다. ‘친목’도 좋아하고 신규 선생님들을 누구보다 ‘환영’하지만 고깃집에 앉아있기는 싫다. 혹자는 ‘된장찌개를 먹으면 되지 않냐 ‘고 하지만, 개를 먹지 않는 사람이 굳이 요리된 개의 냄새를 보고 냄새를 맡으면서 보신탕 집에서 오래 있고 싶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내가 먹을 메뉴가 있는지와는 별개다. 고르라며 선택지가 도착했지만 모든 선택지가 고깃집일 때도 물론 속상하지만, 그럴 때보다도 식탁에 앉아 진짜 피해자인 동물에 대한 대화는 일절 하지 못하고 비건인 ‘인간’이기에 챙김과 걱정을 받을 때  커다란 슬픔을 느낀다.


  슬픔이 큰 만큼 반대의 상황에서는 엄청난 환희를 느낀다. 책을 빌려갔던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호기심을 통해 주변인이 비거니즘의 세계로 들어올 때 매우 기쁘다. 식사 자리에서 ‘저도 같이 비건으로 먹을게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기쁘다. 밥을 먹으면서 나누는 대화의 주제가 내가 아닌 식탁 위의 동물이나 비거니즘 자체일 때 즐겁다. 혹여 우연히 다른 비건 교사라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한 때 블로그에 ‘비건으로 살아남기(비거남기)’라는 주제로 비건 식당 기록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땐 비건 식당을 많이 아는 것이 나를 살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비건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비건이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그들의 슬픔을 살피고 환희의 순간들을 만들어주길 바란다. 동물의 고통을 직시하기 위해 복잡다단한 환희와 슬픔의 순간들을 겪고 있을 비건 사회인들에게 연대가 담긴 안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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