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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맏이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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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자 Sep 14. 2023

맏이 16. 6월 25일

1950년 6월 25

    

아침 일찍 일어나니 기분이 상쾌하다. 집 앞의 배나무가 싱그럽다.

“형님, 오늘 날씨가 좋아요.”

하니 붙임성 좋은 서울 토박이 형수님이

“서방님 오늘 구경 잘 하시겠수.” 하고 웃으시며 부엌일이 바쁘시다.     

그런데 숭의동 앞 신작로를 오가는 사람들의 거동이 바쁘고 심상치 않다. 뭔가 떠드는 소리가 요란한데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그 소리는 점점 커지고 급히 집 앞을 지나간다.     

‘시민 여러분, 북한군은 금조 4시 남한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여러분은 당황하지 말고 라디오나 속보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라며 군인, 경찰은 속히 원대복귀 해주시기 바랍니다.’ 요지는 이런 내용이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그동안 38선 부근 특히 개성 송악산에서의 소규모전투가 자주 있었기 때문에 또 그런 싸움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의아했다. 가두방송까지 하는 것을 보면 이건 진짜 같다고 생각하고 월미도행은 중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오가는 시민들의 발걸음은 빨라지고 시가 방송은 되풀이 되풀이 중복되어 그 소리는 이제 비명과도 같았다. 모든 상황이 이렇게 급변하니 나는 형님에게 인사를 하고 부대가 있는 김포로 향했다. 이것이 형님과 종전 후까지 이별하게 될 줄이야. 

오후 두 시쯤 김포로 와보니 이미 학교의 기간요원과 후보생들은 모두 서울 남산으로 갔다고 한다. 외출자는 오는 대로 남산으로 집결하라는 것이다. 늦게 도착한 외출자와 함께 학교를 떠나려고 하는데 비행기 한 대가 급강하하면서 요란한 기총소사를 가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땅에 엎드렸다. 소련제의 야그기다. 한두 번 선회하더니 저공으로 북쪽을 향해 날아갔다. 피해자는 한 사람도 없었으나 이때 북괴의 침공 사실을 실감했다. 해방 직전 일본 기부항공학교에서 공습당한 기억이 잠시 머리를 스쳐갔다.     

 그날 저녁 남산에 모인 우리 후보생은 결사대를 조직했다. 적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거부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다. 대거 남침을 개시한 북괴군은 탱크를 앞세워 빠른 속도로 서울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동안 공병학교에서 배운 폭파기술을 활용하여 탱크가 통과할 도로에 지뢰를 매설하고 때로는 도로 양쪽에 호를 파서 대여섯 개의 콘포시숀 폭약을 끈으로 묶어 탱크가 지나갈 때 그 밑 부분에 그것을 던져 폭파시키려는 것이었다.

의정부 남쪽 태능 부근 국도에 도착할 때는 이미 후퇴하는 군인과 피난민이 계속 남하하여 일찍이 보지 못했던 비참한 광경에 사태의 심각성을 절실히 느꼈다. 후퇴하는 군인마다 피투성이가 되어     

“탱크가, 탱크가…….”     

하면서 피로에 지친 걸음을 재촉한다. 우리 국군은 탱크를 막을 무기가 전혀 없었고 각 부대에 105mm 대전차 로켓포가 하나 있을까 말까의 전력이었다. 심지어 결사대로 뽑혀 나온 우리도 소총조차 하나 없고 가진 것은 폭약뿐이었다.

우리는 현지에 도착 즉시 호를 파며 폭약의 조작, 대전차 지뢰의 매설을 위한 사전 계획을 수립하고 작업에 임했다. 대전차 지뢰의 매설은 이곳에 와서 처음 취급하게 됐는데 미제와 일제의 두 가지였다.

임시 편성된 교관인 소대장의 교육과 함께 작업을 시작했다. 기점을 정하고 1번부터 순서에 따라 거리를 정하고 규정대로 깊이가 얼마며……하며. 1조 2조로 나누어 지뢰를 매설하는 첫 번째 실습을 하는데 뜻밖의 일이 생겼다.     

 지뢰매설 요령을 시범하던 한 후보생이 실수로 지뢰를 무릎으로 헛디딘 것이다. 10여 명이 주위에서 돌아가며 견학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나는 어떤 후보생의 뒤에서 보고 있었는데 ‘찡-’하는 소리에 (‘꽝!’ 소리가 고막이 터지면서 나는 느낌) 정신을 잃었다. 바로 얼마 후 순간적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나는 도로 밑 둑방에 있었다. 나는 적의 포탄으로 폭파된 것으로 생각했으나 먼 곳을 보니 피난민이 부락 앞길을 걷고 있었고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은 그 모습에 안심하고 일어났다. 다른 조의 후보생들이 달려왔다. 지뢰가 오발했다는 것이다. 폭발 장소를 살펴보니 우리 조의 후보생은 하나도 안 보이고 나만 살아난 것 같았다. 첫 출전에 이런 불상사가……. 6.26 오후의 일이다.

급히 희생자를 확인하는데 평소 나와 같이 내무생활을 한 홍순식 후보생이

“강 후보생…, 강 후보생…” 하면서 신음하는 소리가 들린다. 10m 정도 떨어진 길옆 바위 밑에서 나는 소리다. 급히 가보니 아직 숨은 쉬고 있는데 부상이 보통이 아니다. 한쪽 다리목은 떨어져 나갔고 얼굴은 눈만 용케 남았다. 살이 모두 떨어진 채 가슴이며 배며 찢어진 그 모양은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눈은 보였던지     

“강 후보생, 나 좀 살려 줘~”     

하면서 욕을 퍼붓는다. 그러나 그 기운도 출혈과 함께 불이 꺼지는 듯 결국 죽고 말았다. 한 2~3분 사이의 일이다.     

 후보생의 희생은 7명이었다. 명단을 확인하면서 신원을 조사하니 세 사람만이 확인되었고 나머지는 분신되거나 갈갈이 찢어진 살가지만 흩어져 있어 마치 도살장을 방불케 했다. 나는 다행히 아랫배에 파편이 맞아 런닝 샤쓰에 구멍이 났으나 그리 대단치는 않았다.

우리의 작업은 중단됐다. 후퇴하는 군인들이 이제 소용없다고 하니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탱크 속도로 보아 얼마 있으면 이곳까지 도달한다고 후퇴를 권했기에 그 말에 따랐다. 우리는 그날 밤 적의 침투가 이 지역까지 제압했기 때문에 다른 작전 지시를 받고 밤을 새워 광나루다리 (지금의 광장교)로 향했다. 다음 작전을 위해서다.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피난민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한강변에 오니 많은 사람이 우왕좌왕 모두 불안한 표정들이다. 서울 시민들은 시시각각 들리는 포 소리에 피난 갈 채비에 바빴고 군인을 볼 때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느냐고 묻기에 혈안들이다.

정부는 이미 수원으로 이동했다고 들었다. 그러니 정확한 상황을 알 수가 없었으나 미아리 고개에서 수도 서울 고수의 일전에 모든 군인들은 후퇴시의 소속을 무시하고 현 위치에서 지휘관의 통솔을 받아 진지를 구축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서울이 북괴군에게 탈환되었을 때 한강 도하를 막기 위해 한강대교와 철교 그리고 광나루다리를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우리 후보생의 일부는 한강 다리로 향했다. 당시 한강 상에는 3개의 다리만 있었을 뿐이다. 서울 점령은 풍전등화의 운명처럼 느껴졌다. 간간이 들리는 포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피난민은 수없이 다리를 건너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는데 폭파 준비를 위해 통제된 다리 위는 주의에도 아랑곳없이 한동안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제는 다리 통과는 안 된다는 상부의 지시에 피난민들은 다리 밑 강변으로 몰렸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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