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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맏이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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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자 Sep 12. 2023

맏이 14. 조선경비대 입대

 1948년 2월

그렇게 생활은 계속되었는데 하루는 부락 이장이 나를 찾아왔다. 영환이 너는 일본 군대도 갔다 오고 공부도 했으니 말도 배울 겸 경험을 얻기 위해 조선 경비대에 입대하면 어떻겠냐고 하신다. 조선이 독립하면서 자위를 위한 군대는 필수적이라 절대적으로 유망하니 출세도 할 수 있을 거고 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지 모른다고 하신다.

 나는 일본 군대에서 지독할 정도의 경험이 있어 다시는 군대는 안 가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촌구석에서 또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는가 싶었다. 무위도식하면서 식량을 축내는 것보다 나 하나만이라도 입을 덜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장남으로서의 사명감과 이런 계기를 내 능력으로 이겨보겠다는 신념마저 갖게 되었다. 조선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에다 자신감마저 갖지 못한 현실이지만 이것쯤이야 하는 용기가 크게 작용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무기력을 한탄하며 나의 소신에 걱정스럽게 승낙을 하셨다.

다음날 나는 조선 경비대 7연대에 입대했다. 입대 후의 훈련은 나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일본 군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경비대의 초창기라 주로 일본식과 미국식의 훈련 방법이 나에게는 아무 부담도 주지 않았으나 식사만큼은 일본 군대와 같았다. 밀밥에 콩나물국이 매일같이 나왔다. 졸병부터 다시 시작하는 나의 운명을 한심하게 느끼기도 했으나 꾹 참았다. 이렇게라도 인생을 개척하지 않으면 내게 무슨 기회가 있으랴.

 막상 일본으로 혼자 간다 하더라도 부모 형제 버리고 가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 인종 차별이 심한 그 굴욕스런 일본에서 성공을 해봤자 그렇고 또 그동안에 부모님이 자식 이름 부르며 돌아가시는 그런 비극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부모 곁에서 서로 위로하며 내일의 희망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부모님의 못 다한 소원을 내가 이루어드리는 것이 자식의 도리가 아닌가.

아버지, 어머니. 용서해주세요. 나는 아버지 어머니를 탓하지 않습니다. 시대에 적응하시느라 지독한 가난에도, 그토록 혹독한 일본의 압정 속에서 고생하신 것도 모두가 운명이 아닙니까. 인간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돈은 무엇입니까. 돈이 있으면 그 동물은 인생이 조금 편하겠지요. 그러나 마음은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모두가 한가지입니다. 과거를 탓하지 마세요. 자식으로 하여금 되풀이하지 않는 지혜를 가르쳐 주십시오. 아버지, 어머니. 나는 이 길로 가렵니다. 나는 이 길밖에 없습니다.


경비대가 대한민국 국군으로 개편되고 그동안 청주에서 영등포 그리고 오류동의 신설 부대로 이동했다.

해방 후의 조선은 이승만, 김구등 외국에 망명 중이었던 독립지사들이 속속 귀국하면서 미국 군정 속에서도 정치적으로 많은 혼란과 많은 정당의 난립으로 국민들은 독립의 기대에 흠이 갈까 걱정도 많았다. 특히 공산당의 암약으로 발생한 여수, 순천의 경비대 14연대의 반란사건, 제주도 반란 사건 등 양민 학살은 극에 달했고 지리산 토벌 작전에 많은 군인과 경찰이 참가하여 작전을 수행하였으나 우리 부대는 통신학교였기 때문에 참가는 하지 않았다.

 불순분자 색출을 위한 수사는 군인뿐만 아니라 사회단체, 민간인까지도 그 대상이 되어 조금만 언동이 수상하거나 공산주의자 숭봉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갔다. 반란 사건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그 소동은 계속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이 당선되어 명실공히 세계에 독립을 선언했다. 이조 말기에 끊긴 조선의 주권은 36년간의 일본 압정 밑에 나라를 빼앗기고 실의 속에 일본, 지나, 만주 기타 미국 등 외국으로 건너갔던 그 많은 백성이 속속 귀국하여 정든 고향에서 터전을 잡아나갔다.

 그 소용돌이 속에 우리와 같은 서민은 설움을 안고 독립 속에서도 우왕좌왕 가난과 싸워야 했다. 내일을 꿈꾸며 사는 군상도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나 자신도 나만의 곤경 타파에 허덕이면서 또 부모와 헤어져 일개 졸자로 우물 안과 같은 세상 속에 앞만 보고 그날그날의 일과에 몰두했다.

영등포 오류동에 위치한 51통신대대에 편성되어 군수과 급양계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하사로 진급하였고 6개월 후에 1등 중사로 또 올랐다. 나의 임무는 부대의 양식을 수령 보급하는 일이었다. 그 직무에 충실함과 동시에 운동시간에는 늘 장교들과 배구시합을 하는 등 장교들로부터 호평을 얻었다. 일반 사병과는 질이 다르고 사병의 수준이 아깝다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졸병의 고생을 잊을 정도로 좋은 시절을 보냈다.


그때까지도 역시 조선말은 형편없었으나 시간이 있으면 공부도 했다. 어떤 장교가 사관학교에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길래 내심 언어의 불편은 있지만 기회만 된다면 한번 시험을 보고 싶었다. 그 수준을 알아보았더니 고등학교 졸업이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책을 더 많이 봐야 하고 병과에 따라 또 그에 맞는 과목도 공부해야 하는데 깊이 생각해보니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커다란 실망감에 싸여있는데 어떤 장교가 시험에 필요한 책 한 권을 주면서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분위기가 이러하니 그만두면 졸장부라 용기를 내어 공부를 계속했다. 수학은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 일반 사관학교는 포기하고 그 무렵 각 특수병과의 간부 후보생 모집이 일제히 시작되어 나는 공병 사관후보생에 응시했다. 다행히 일본 항공학교에서 전기 공학을 배웠기 때문에 혹 이것은 자신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특과는 또 나의 성격에도 맞을 것 같아서 나와 같은 뜻을 가진 친구와 한 날 시험을 치렀다. 문제는 뜻밖에도 내가 중점을 둔 과목에서 많이 나와 발표날을 손꼽아 기다리니 나의 합격이 확정되었다.

만세! 나도 이제 장교가 된다. 나를 사랑해주던 장교와 상사들에게 알리니 모두 축하한다며 파티까지 열어주었다. 같이 시험 본 친구는 떨어졌다. (후에 현직 임관했다,)

그날부터 나는 입교일인 1950년 2월 1일까지 편히 쉬면서 나의 신변을 정리했다. 물론 고향에도 편지를 냈다. 그러나 그동안 편한 자리에서 생활한 곳을 떠나 훈련이 심한 사관학교에 가는 것이 한편 서운했으나 현실에 만족하지 말고 앞을 보면서 살아야 할 것 아닌가. 병신같은 내가 모처럼 얻은 기회인데 하고 인내할 것을 다짐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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