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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맏이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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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자 Sep 11. 2023

맏이 13. 정착지 문동리

1946년  4월

 

먼저 귀국한 아버지는 이곳 문동리에 농토를 구입하고 삼칸 집 한 채를 마련했다. 농토는 적산토지 여섯 마지기였다. 밭도 없었다. 논도 좋지 않았다. 여섯 마지기면 당시에는 쌀 수확이 모두 잘 돼야 연 10가마니 정도였는데 이것이 우리집의 총 생산능력이니 타산이 맞지 않는 생활 터전이었다. 아버지도 아직 젊다고 하시면서 매일같이 농사 이야기로 동네 사람들과 상의도 하면서 나날을 보냈다. 농사 경험도 없고 생활의 수지타산도 불안한 상태였으나 아버지는 다분히 정서적이었다.

 농사짓고 풍류를 즐기며 이상적인 농부의 생활로 만족하며 그렇게 그렇게 살려고 하신 모양이었다. 일본에서 매일같이 혈기 있게 사시다가 반대세력에 장애를 얻게 되고부터 의기소침했다. ‘죽어도 고향 땅에서’라는 사고가 오늘에 이른 것에 대한 자기 인생 실패를 자인하면서 조용히 살고 싶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와 반대로 현실적 사고로 늘 자식들을 염려하면서 바보가 된 4형제의 이야기만 나오면 몰래 눈물을 흘리셨다. 나도 속수무책이었고 희창이도 그랬다. 농사일을 거드는 데는 인력은 충분했으나 한 사람이 농사짓는 거나 형제가 모두 협조해서 짓는 거나 수확은 같다. 인력의 낭비뿐이 아닌가. 생산은 한계가 있고 논 여섯 마지기에 의존하는 생활은 금방 바닥이 나고 말았다. 일본에서 짧은 시일이었지만 미군 부대에서 번 돈으로 장만한 이불, 생활용품 등은 식량으로 바뀌어져 남의 손에 건너가 버리고 약간의 식량은 4형제의 배를 채우는데 모두 소모됐다. 그 아까운 물건들이 하나하나 보람도 없이 날려만 갔다. 그렇게도 어머니가 걱정하시던 그런 상황이 된 것이다.

 이웃 사람들은 인심은 좋았으나 역시 빈곤으로 허덕이는 실정이라 그 누가 도와줄 사람이 있었겠는가? 고향을 지키며 살던 사람들은 적은 농토로도 마음 편하게 살아나갔고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우리는 일본의 삼대 도시의 하나인 나고야시에서 살아온 문화의 정도가 이곳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났다. 대화조차 상대가 안 되었다. 그러나 배는 고팠다. 배가 고프니 체면도 그렇거니와 문화 운운하는 것은 미친 사람의 잠꼬대와 같았다.

더구나 조선말도 모르고 재산도 없고 관습도 모르니 자연히 남을 피하게 되고 말을 걸어오면 고개만 끄덕했으니 일본에서의 문화인은 이곳에서는 상병신이 된 것이다. 나의 자존심은 극도로 나를 괴롭혔다. 자존심은 죽어가고 병신과 같은 무능력자로 전락한 우리의 신세에 한숨만 쉬었다.

 일본에서의 생활이 그리웠다. 자기 의사대로 행동하고 비판하며 토론하고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생활도 구상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우리는 왜 이렇게 엄청난 현실에서 허덕여야 하는가.

아버지의 정서에 처자식의 고통을 감안하지 않은 채 20년 가까운 인격의 소지인 일본식 생활 방식을 하루아침에 조선식으로 바꿔 놓았다. 우리 가정의 앞날에 더 많은 시련을 예측하면서도 그대로 공간과 시간을 감수해 온 나는 과연 무엇인가.

 이웃 친구의 권유로 척산리에 있는 금광에서 일을 시작했다. 금광에서 그 무거운 광석들을 운반하며 일당으로 몇 푼 버는 막노동이었다. 처음 져보는 지게, 어깨가 빠질 것 같은 그런 일에도 나는 열심히 했다. 나는 천부의 건강과 일본 군대에서 단련된 인내심과 정신력으로 견디어 나갔다. 말은 필요없고 몸만 구사하는 일이기에.

그러나 결국 그 일도 오래 가지 못했다. 친구가 그만둔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보호자나 동지가 없으면 일을 할 수 없는 벙어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 수는 없었다. 다음에 한 것이 인천까지 가서 파는 감 장사다. 원래 이곳은 감의 생산지인지라 소비지인 인천에 가지고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친구의 말을 따라 시골에서 함께 오라감을 사다 륙삭크(배낭)에 잔뜩 담아 기차를 타고 가서 파는 일인데 이것도 쉽지는 않았다. 이골이 난 인천 상인에게 번번이 헐값으로 팔게 되니 본전만 남게 되고 밥 굶는 것만큼 돈이 남으니 이것 역시 몇 번 하다 그만두었다.

 일본에서 배운 교육은 이곳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농부로 태어나 농사에 익숙한 이곳 청년들에 비하면 너무나 무기력했다. 적재적소가 아닌 것이다. 그 무렵 아버지는 지병인 종양 때문에 등에 큰 종기가 생겼다. 일본 있을 때 생긴 악성종양인 후발치 때문에 병원에서 절개수술을 받아 한때 큰 걱정을 한 적이 있었는데 또 이곳에 와서 병이 났으니……. 약값도 없어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고 하는 약초를 구하여 치료하니 한 6개월의 고생 끝에 나으셨다.

귀국한 지 2년이 지났다. 생활은 나날이 궁색해지고 그야말로 밑바닥 인생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불평불만만 커지고 사사건건 원망만 늘어놓았다. 하루는 견디다 못해 어머니에게 마음에도 없는 불만을 늘어놓았다.

“어머니, 이렇게 살 바에야 나 다시 일본으로 건너갈 거야. 마산에만 가면 일본으로 밀항하는 배가 있다고 하니 그곳에 다시 가서 돈 벌어 어머니 모실게.”

그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어머니는 기겁을 하시면서 반문하신다.

“너 뭐라고 했니?”

“나 일본 갈 거야.”

내뱉은 소리다. 어머니는 정색을 하시면서 울음 섞인 말로

“아이고, 네가 그런 소릴 다 하는구나. 이제 우리 집안은 그만이야. 부모를 잘못 만나 너희들에게 고생시키는 것이 미안하고 천추의 한이었는데 막상 네가 그런 말을 하니 나는 어떻게 하니.”

하시면서 몸을 떠신다. 그 슬픈 어머니의 표정은 가련할 만큼 일그러졌다.

젊은 인생을 아버지에 의지하고 다복하게 키운 4형제를 건강하게 그리고 나름대로 교육도 시키고 성장하는 그 자체에 희망을 거셨다. 아버지의 사랑보다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오늘에 이르렀거늘 자식의 입에서 부모마저 버리고 자기 길을 가겠다니 그 배신은 청천벽력 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이때 나는 일생동안 가장 큰 불효를 하는구나 하면서 그 말을 후회했다.

“어머니, 나 안 갈 거야. 어머니하고 같이 살 거야.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니 두고 봐요. 조금 있으면 뭔가 복이 있을 테니까. 하느님!” 하고 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이곳 시골은 우리가 살 곳이 못 된다. 무슨 수가? 그런 생활이 계속되면서도 별수가 없었다. 내가 도시에 나가 적성에 맞는 직장이라도 있으면 했는데 그놈의 말을 할 수 없으니……. 글로 쓰는 것은 일본식 한문과 우리 한문이 음과 뜻이 같기 때문에 늘 글로 의사표시를 했고 그 수준은 높이 평가받기도 했으나 글과 말을 배우는 데는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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