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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맏이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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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자 Sep 09. 2023

맏이 11. 미군부대에서

미군부대(美軍部隊)에서 1945. 11


그 무렵 희창이는 군대 갈 나이도 아니어서 나고야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조선 사람의 위치가 속국인이 아닌 외국인의 위치인지라 각지에서 그 위세는 대단했다. 괄시 없는 세상…….

하루는 나더러 다시 나고야 시내로 이사 가서 살자고 했다. 일자리도 있다고 한다. 이미 진주한 미군 부대에서 벌든지 일거리는 얼마든지 있다고 하기에 하루는 그 일거리를 확인하기 위해 시내로 나가보았다.

시내는 완전 폐허가 되고 미군들이 복구작업을 하고 있었다. 최신 장비를 가지고 복구하는 모습에 일본인은 경탄했다. ‘저런 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했으니…….’ 하며 혀를 끌끌 찼다.

일자리가 있는 곳을 가보니 항구의 하역작업이었다. 주로 야간인데 야간이 수입이 좋다고 하기에 나는 야간을 희망하고 동생은 낮에 일하기로 했다. 그날 밤 처음 현장에 가보고 깜짝 놀랐다. 선착순인 데다 좋은 자리에 서로 가려고 경쟁이 대단하다. 그날 나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깡패들이 먼저 자리를 정해 놓고 저희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나는 밀려나고 만 것이다. 할 수 없이 집으로 그냥 돌아왔다. 동생 말이 그곳에서는 주먹이 있어야 하고 지금 거기에는 고또라는 주먹이 있어 그 비위를 맞춰야 한다고 한다. 모두 와이로를 줘야 겨우 된다고 했다.

나는 어려운 일자리라고 생각했지만 밤에 또 나가 줄을 섰다. 그 깡패인 고또가 선 바로 뒤에서 자리를 잡았는데 한참 후 나에게 손을 내민다. 나는 모르는 척했다. 시비만 걸면 한방 칠 생각이었다. 나는 군대에서 단련한 체력이 있고 또 나는 조선인이다. 아무리 혼란해진 전후(戰後) 사회라 할지라도 법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마침내 그놈이 내게 말을 걸었다.

“어이! 이 줄은 너희는 안 되니 딴 데로 가!”

한다. 왜냐고 따지니까 무슨 말이 많냐고 하면서 가라고 하면 가라고 눈을 부릅뜬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인력시장 같은 이곳에도 밤에 일할 자리는 여러 군데 있는데 딴 곳은 밤새도록 도람(drum) 굴리기, 상자의 하차작업, 그밖에 오물 청소 등인데 이 줄은 주로 약품, 과자, 담배 등 고가품을 취급하는 일군으로서는 하이클라스의 직장이라는 것을. 나도 참지 못했다. 군대식으로 한 대 쳤다. 대단한 주먹에 그는 놀란 모양이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무리가 모여들었다. 아직 접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미군 감독관은 없었다. 일본 깡패들은 1:1 대결을 깡패의 정도(正道)로 생각한다. 그놈은 나에게 말했다. 어느 파냐고! 물론 깡패 집단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당당히 맞섰다. 564라고! 이것은 일복 식으로 ‘고록시’다. ‘죽인다’를 줄인 말이다. 그놈은 그 말뜻을 몰랐으나 어감이 깡패들에게는 위압을 느끼게 하는 말투다. 내게 한 대 맞은 그놈은 내일 아침에 나갈 때 보자고 하면서 깨끗이 자리를 양보했다. 내일 아침 무슨 보복이 있을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으나 결국 밤에 함께 일하면서 화해가 되었다. 같이 협력해서 일을 하자고. 그때부터 나는 매일 밤 일을 하게 되었다.

그놈들의 일은 일반 노동자와 같이 밤일을 하는데 나올 때 미리 훔쳐 놓은 물건들을 조직적으로 밖으로 운반하고 낮에 시내에 가지고 가서 분배하거나 돈으로 바꾼다. 개인으로는 수확이 적기 때문에 동지끼리 조를 짜는데 결국 담력이 있고 주먹이 있어야 한다.

그 후 고또와는 친밀한 관계가 되어 조 활동도 활발하게 했으나 하루는 약품 창고에 입고 중인 열차 탈취까지 꾀하다 미군의 총격으로 한 동지가 다리에 총을 맞았다. 그 여파로 결국 모두 그만두게 되었다. 욕심부리다가 목숨 잃게 된다며.

이렇게 되기까지 한 4개월은 계속되었고 나의 수입도 상당했다. 이렇게 되어 우리는 도로 나고야로 이사할 수 있게 되었다. 두 형제의 벌이로 이사도 하고 먹을 것도 충분하고 동생들은 계속 학교에 다녔다.

돈을 갖게 되니 나는 우쭐해졌다. 공돈이니 쓰는 곳이 주로 향락지였다. 그 무렵 친구는 모두가 깡패들이었고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사회의 혼란기이고 또 나는 아버지의 연락을 받으면 조선으로 갈 사람이니 마음대로 살다가 가는 것이다. 참으로 좁은 소견이었다. 건강도 좋았다. 배짱도 늘었다.

이 무렵 아버지로부터 편지가 왔다. 어머니는 가지 말자고 했다. 또다시 편지가 왔다. 할 수 없이 약간의 돈(교환 가능한)과 이불 용품 등, 짐을 싸고 쓸쓸한 연락선을 탔다. 나의 인생 21세 되던 봄 4월이었다.

되돌아보면 참으로 긴 세월이었고 철없던 유년 시절부터 소년 후기까지 나로서는 인생의 주관도 없이 그때그때 일어나는 상황에 따라 살아온 것만 같았다.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일제 합방 이전에 태어나시고 격동의 역사 속에 조선 민족으로서의 애환을 안고 인간이기에 인간으로서 당면한 삶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온갖 노력을 해오신 것 같다.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으로 모든 백성의 창씨개명과 토지개혁, 일본식 교육, 생활 방식의 개혁 강요. 인권 유린 등은 순박하고 윤리 도덕을 숭상해오던 우리 민족에게는 참으로 천지개벽과 같은 대 국난이 아니었던가. 1910년 정식으로 합방된 후 변화되어 가는 그때 상황에서 일본식과 조선식의 생활 환경 속에 민족의 자존마저 흔들리고 일제가 계속되면서 더욱 그 상황은 심화해 갔다. 

부모님의 결혼은 중매로 때가 되어 결혼하게 되고 아버지는 그때의 상황에서 반항보다 적응으로 꿈을 키우신 것 같았다. 그것은 일본으로 건너가 전통적 가난을 면치 못했던 충정을 타개해 보려는 인생계획의 하나였으리라. 여기까지의 전개 상황은 마치 연극의 제1막이라 할까. 제2막은 아버지의 활동과 성공시대이고 제3막은 아버지의 테러에 의한 몰락과 세계대전의 발발, 제4막은 자식들의 성장과 일본식 교육으로 일본화된 형제, 마지막으로 그 인생은 종전과 함께 불행의 길로 귀국. 1945.8.15. 2차 대전의 결과 조선은 국권을 되찾아 36년간의 일제 강점기로부터 대한으로 국호가 바뀌어 독립했다. 또다시 조선화 시대가 온 것이다. 나는 조선을 너무 모른 채!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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