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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맏이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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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자 Sep 08. 2023

맏이 9. 일본군입대

 

나는 19세의 봄에 일본군 소년 비행병으로 입대했다. 그저 그때 현실에 적응해 나가야만 하는 당시 상황 속에서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락민의 환송을 받으며 기차에 올랐다. 그래도 일본이 이겨야 우리 조선인도 사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그때쯤 우리 조선 사람들은 전전긍긍했다. 잘 되면 모르지만 잘 안되면 또 관동대지진 때와 같이 조선인 학살이 있을지 모른다는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미 국내는 식량부족에다 생활필수품 등의 배급제가 시작되고 쌀과 고기류의 매점매석 행위가 시작되면서 생활은 극도로 곤란에 빠졌다. 물론 나는 그런 분위기는 아랑곳없이 젊은 혈기로 그날 저녁 이웃의 岐阜航空學校(기부항공학교)에 입학했다. 우리 또래에서는 그나마 늦게 입대한 것이었다.

얼마 후 미군의 공격은 가열해가고 일본 전국은 긴장의 연속으로 민심도 험해가고 뉴스마다 ⭕⭕가 옥쇄, 또 사이판, 괌, 이름도 모르는 일본 진지가 함락해 갔다. 드디어 나고야에 미B29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내가 군에 입대한 후 부모님은 3형제를 데리고 나고야 폭격을 피해 춘일정군(지금의 춘일정시)으로 피난하고 계사(鷄舍)를 개조한 임시 숙소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생활은 말할 것도 없이 궁핍하고 거기에다 아버지는 악성 후발치까지 앓았으니 설상가상의 불행한 처지였다. B29의 공습은 주로 나고야에 국한하여 매일같이 파상공격을 했다. 어머니는 동네에서는 인심을 얻어 동네일로 조금씩 주는 호의로 생활을 이어갔다. 내가 출정한 군인이라는 것이 한몫을 보았다.


한편 군대에 입대한 나는 모진 군대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쳤고 긴장 또 긴장 그대로의 연속 생활이었다. 일본 특유의 폭력 기합은 너무나 가혹할 지경으로 이놈의 기합만 없으면 그래도 학교니만큼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는데 이것은 사람의 본능을 억제했다. 정신 이완을 막는다고 상급생들은 하급생을 핑계만 있으면 때려잡는다. 이제 자존도 없고 완전히 동물의 무리다.

식사는 영양가를 따질 그런 수준은 예부터 일본군대에는 없다. 모두가 정신력으로 배고픔을 이겨내라는 것이 이 집단의 전통이라 한다. 이런 속에서도 소정의 교육은 예정대로 진행됐고 나는 수차례의 교육평가에서 좋은 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 밤 일석점호 때 상급생으로부터 교만하다는 이유로(경례를 늦게 했다고) 호되게 두들겨 맞았다. 잘해도 기합 못해도 기합, 조선인이란 선입견에서인지…….이놈들!!! 취침 후 이불 속에서 입대를 후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다가 잠이 들곤 했다.

어느 날 미 그라망 함재기가 이 학교를 공습했다. 이 학교 바로 옆에 카가미하라(各務原) 비행장이 있었기 때문에 공습 목표가 된 것 같다. 천지가 진동하는 아수라장이 벌어지고 각자의 부서에서 대공사격을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후부터 공습은 자주 있었고 경계경보만 발령되면 대공 감시초가 있는 학교 앞산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산에 오르내렸다. 야간에도 발령 때 수동 전화기를 들고 오른다. 나고야 지방에 발령된 것도 이곳까지 유효하기 때문에 별 도리 없다.

야간의 등산은 죽을 지경이다. 한 30분의 거리지만 어두워서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그러나 낮의 배치는 나에게는 휴식시간과 같다. 호 속에서 남쪽 7Km에 있는 나고야 시내도 보이고 한두 시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산에서 내려올 때 저기 보이는 나고야의 부모님과 형제의 안녕을 빌었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면서 학과 공부는 엉망이 되었고 주로 비행장에 있는 모조 비행기의 보호와 수리 작업이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알고 보니 비행장에 최신 전투기는 하나도 없고 지상 격납고에 있는 비행기는 모두 대나무로 만든 가짜 비행기였다. 거기에 위장망을 씌웠으니 그 많던 비행기는 다 어디로 갔나? 그러고 보니 학교에서 교재로 쓰이던 낡은 비행기도 없다.

모두 발동이 걸릴 때마다 폭탄을 조종사 의자 밑에 싣고 날기만 하면 모두 특공대용으로 써먹었단다. 만세 부르고 마후라 두르고 그런 비행기 타고 간 젊은 비행병이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 그저 의지만 외치는 막판이 온 것 같다.

입대 후 6개월이 되니 항공 상등병으로 승진했다. 별 세 개로 지원병 같으면 고참에 해당하는 밥그릇값이다. 그러나 그 계급은 아무 소용없는 사치품에 지나지 않는다. 전국은 이제 점점 아군에 불리해졌고 군기는 문란해지고 고참 일등병이 항공 상등병을 트집 잡아 기합을 주는 그런 형편에 이르렀다. 물론 공공연한 일은 아니나 이런 일은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계급이 상등병이라 이제부터는 현지 실습 기간이 1년이란다. 별써 우리들의 후배는 며칠 전에 입교식을 가졌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생활로 이어져 갈 것이다. 우리는 곧바로 야간열차로 교토(京都)로 이동했다. 교토 부근의 한 비행장에서 근무한단다. 이때부터 병영 생활이 아닌 절간에서 교육장 겸 숙소로 생활하게 되었고 일과는 주로 교육과 인근 비행장 근무였으나 이미 비행장에 비행기는 없고 새 비행기 올 때만 기다리게 되었으니 내무생활 외는 별 할 일이 없고 밖의 소식과 작전 전황도 알 길이 없었다.

B29의 공습은 여전했고 오사카, 나고야, 동경 등이 주로 목표였으며 이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습을 했다. 이상하게도 교토는 공습이 전혀 없었다. B29가 공습할 때는 수십 대의 B29가 은빛을 띤 편대로 오면 가고, 또 오고 파상으로 고공을 날 때는 참으로 가관이었다. 우리 비행기의 도전은 전혀 없는 것 같았는데 하루는 자세히 보니 저 높은 고공에서 파리처럼 좌로 우로 B29를 향해 돌진하는 것이 보인 적도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즈음, 후에 안 일이지만 일본 함대의 전멸, 야마모도 대장의 전사 등 결정적 패색은 짙어져만 갔다. 


무더운 여름이 계속되고 일과는 여전하다. 법당에다 비행기의 전자 기기 등 주로 검사기기의 실습을 하며 때로 비행장에 나가서 잡일을 했다. 저녁이 되면 또 상하급생이나 동급생들의 절차탁마가 시작된다. 각자의 반성에 따라 자기 스스로 정신 함양을 위한 노력인데 만약 전체에 미치는 반성감이 있으면 연대 기합이 시작된다. 잠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병영 생활이다. 이곳 역시 전전긍긍하는 분위기다. 그래서 유행한 노래 가사가 있다. 슬픈 곡조의 가락에 그 한 소절을 적으면 ‘シソペクサソウ…….’ 이 곡조는 취침 나팔의 곡에 붙인 가사다. 즉 ‘신병들은 불쌍하구나, 또 이불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가!’

이런 생활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일본 교토의 아침은 맑고 조용했다. 교토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 절간에서 기상의 호각소리와 함께 매일같이 교육, 훈련이 반복되어 갔는데 岐阜본교로부터 이곳에 온 지도 벌써 5개월이 지났다. 입대 한지 1년여가 된 것이다. 상등병의 계급이지만 아직 항공학교의 생도들이다. 1년 반이면 병장 진급과 동시에 졸업하고 일선으로 배치되는 그 과정인데 나날의 일과가 폐쇄적이고 정보조차 입수하지 못한 관계로 제2차 대전의 진전상황은 최근에 와서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정도와 수일 전에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신형 폭탄이 투하되었는데 위력이 크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이야기에 불길했었다. 이미 동경, 오사카, 나고야는 폐허가 됐다고 들었다. 그러나 별 느낌을 갖지 못했고 그저 무관심한 아니 무기력한 상태의 생활만 계속됐는데 그래도 병영이 절이기 때문에 융통성 있는 일과가 규율이 엄한 기부의 본교보다 훨씬 고통이 적었다.


절에는 목욕탕이 없어서 가끔 자유의 시간을 가질 때도 있었다. 하루는 아침부터 교육을 마친 후 자유시간이 있었다. 각기 인근 민가에 가서 목욕할 수 있는 시간이다. 나와 같이 간 동료와 둘이서 어떤 민가에 들렀다. 노부모를 모신 젊은 아주머니가 반가이 우리를 맞이한다. 조용한 전형적 일본 농가였는데 그 집 주인 역시 중국으로 군대 가서 생사를 알 수 없다고 한다. 남편을 생각해서인지 수고한다며 성심껏 대접해주었다. 음식도 먹고 심지어 그 아주머니와 할머니는 무엇이든 먹고 싶으면 말해보라고 하는데 말할 수는 없었다. 주인이 해주는 대로 정신없이 먹을 뿐이었다. 평소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고 주의가 심했기 때문에 소년다운 솔직함에 주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배고픔은 말할 수 없었으나 정서가 메말랐던 우리는 그 성의를 결국 받기도 했다. 남편이 부재한 아주머니에게 위로의 말도 잊지 않았다. 팥밥은 일본에서는 손꼽히는 밥이다. 그때 그 맛은 지금껏 잊지 못하나, 그 남편 되는 사람은 무사히 돌아왔을까 마음이 쓰이기도 했다.

일석점호 시간이 임박하여 절에 돌아와 보니 선임하사관의 눈이 평소와 달리 빛나고 있어 육감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유시간에 어떤 후보생이 길가에 있는 오이를 따 먹은 것이 발각된 모양이다. 점호시간에 그자를 세워놓고 연대 기합이 시작되었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지만 모두 몸서리를 쳤다.

한 사람의 죄는 모두의 공동책임이라는 절차탁마식 기합이다. 그 기합으로 그자는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모두에게 구타를 당했다. 반은 죽이다시피 30여 명으로부터의 구타에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대전이 승승장구하는 그런 상황이 아닌, 눈앞에 불이 붙은 그런 상황이고 폭격으로 인한 국민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군기마저 문란해지는 그런 분위기에서 악으로 유지하는 묘한 생활이 이런 기합에까지 온 것을 보고 뭔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패전이란 상상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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