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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맏이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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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자 Sep 08. 2023

맏이 10. 8.15해방

        

8·15 해방 1945.8.15.


그 며칠 후 오후에 누군가의 입에서 ‘오늘 천황의 중대방송이 있었다는데 라디오 소리가 떨려서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으나 전쟁이 끝났다.’고 하면서 비행장에 있던 조선인 징용자들이 만세 부르면서 야단이라 한다. 모두 의아해하면서 서로 눈치만 살핀다. 설마, 그럴 리가……. 그래도 여전히 신풍(神風)을 믿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심상치 않았던 여러 유언비어를 종합해 보면 과연 납득이 간 모양이나 누구의 입에서도 말 한마디 새어 나오지 않았다.


전쟁은 끝났다. 전쟁은 끝났다.


그때부터 동료들의 나에 대한 태도가 이상하리만큼 조심스러워졌다. 항상 나와 친했던 오타라는 일본인 친구는 나의 고향이 어디며 살기 좋은 곳인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등등 묻기도 했는데 승자와 패자의 입장이 바뀌자 그의 태도가 급변한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여하간 지긋지긋한 전쟁은 끝난 것이다. 그날부터 우리의 일과는 일변했다. 누구의 명령도 없었다. 기합은 물론이다. 우리가 갖고 있던 교재, 기구 등 군용품 비행기 정비기계 등의 폐기가 시작됐다. 거부 작전의 일환이다. 적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없애버리는 일종의 작전이라 한다.

 나는 그동안 신세 진 나의 목욕집에 즉시 달려간 것은 물론이다. 그 집 아주머니에게 전쟁이 끝난 것을 알렸다. 중국에 종군한 남편도 죽지 않았으면 곧 돌아올 것이라고 했더니 내심 좋아하는 눈치였다. 나라가 망했는데도 역시 천륜 인륜은 거역하지 못하는 것이구나.

 그후 우리는 급히 짐을 꾸려 기부의 본교로 돌아갔다. 천황 발표 3일 후였다. 전쟁이 끝났으니 미군이 진주하면 무기등 인계 절차를 예상하여 모두 집결시키고 각자의 피복만 갖는 대로 갖고 완전 무장 해제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부모의 피난지인 카스가이군(春日井郡)으로 돌아가니 그때가 8월 23일이었다.

허무한 일본 군대의 말로다. 부모형제는 좋아했다. 아버지는 그때까지 악종후발치로 고생하고 계셨다. 군에서 나온 후에도 한 1년 동안은 피난지에서 생활했다. 이곳은 나고야 근교의 촌이었다. 나의 생활은 허탈한 가운데 무위도식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집이 닭장을 개조한 숙소인지라 냄새도 고약하고 살림하기에 심히 불편한 집이었다. 아버지는 이제 해방이 되고 나라도 독립된다고 좋아하시면서 귀국의 꿈에 부풀어 계셨다. 옛날 친구들과 자주 만나 앞으로의 생활 설계를 구상하고 동분서주하셨다. 반면 어머니는 큰 수심에 잠을 이루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아버지와 말다툼이 가끔 있었다.

이제 조선으로 돌아가자니 그동안 벌어놓은 돈은 하나도 없고 자식 4형제는 완전 일본식으로 성장하여 조선에 가서 어떻게 생활할 것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향수에 젖어 매사의 사고가 귀국만이 살길이라 했다. 그때 내 나이 21세였다. 희창이는 16, 희준이는 11, 희양이는 6살쯤 되었을까.

 어머니는 매일같이 몰래 우셨다. 일본으로 올 때 나를 데리고 살던 조선 생활의 지긋지긋함을 뼈저리게 느꼈던 곳이 아니던가. 그곳에 다시 가자니 금의환향 아닌 그런 처지에서 어떻게 다시 갈 것이며 그동안 일본에서 4형제를 일본식으로만 성장시켰고 조선말도 모르고 조선의 풍속조차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의 장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며 한탄하신다.

참으로 비극의 2막이 아닐 수 없다. 나도 이곳이 싫어졌다. 일본에서의 나의 유소년시절 그리고 일본에서의 군대 생활 등에 멀미가 난 데다 고국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그러나 마음뿐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현실적 감각에 동조했다.

결국 아버지는 조선에 먼저 건너가서 고향에 자리 잡을 테니 연락하면 그때 가족이 돌아오라고 하시면서 홀로 먼저 귀국했다. 어머니와 우리 다섯 식구는 촌에 남게 되었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우셨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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