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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림 Sep 26. 2024

우리는 모두 약간씩 아프다.. 정신이...

며칠 전 있었던 소소한 이야기

오전 에피소드

장 보러 마트에 갔다가 좀 민망한 일이 있었다. 

맥주를 사려고 주류 쇼케이스 쪽으로 손을 뻗는데, 

직원분인 듯한 할아버지가 서둘러 내 옆으로 와 

내 발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시선을 떨구니 박카스 병 하나가 깨져있었고, 

그 주변으로 누런 물(박카스 물)이 흥건했다. 

내 입에서 순간적으로 

“제가 안 깼는데요라는 말이 튀어나왔고, 

말을 뱉고 보니 아차 싶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깨진 병을 밟고 다칠까 하여 

서둘러 내 발치를 가리킨 것뿐인데, 

나 혼자 오버해서 결백을 주장하고 있었다는 자각이 곧바로 온 것이다.

할아버지가 날 보며 때아닌 미소를 지었고

(나의 오해인지 오버인지가 재밌으셨던 것 같다)

나는 캔맥주 두 개를 손에 쥐고 그 자릴 떴다. 


마트에 같이 갔던 큰언니에게 좀 전의 상황을 얘기하니 

“그래, 너 좀 그런 게 있어”라고 하며 웃는다. 

언니가 말한 ‘그런 거’란 아무도 날 공격하지 않는데

나 혼자 방패 들고 설치는 꼴을 말하는 것이리라... 

생각해 보니 내게 그런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고 방어하는 면이...

그렇다면 나의 방어적 태도는 어디서 왔을까?

과거 직장생활의 후유증? 트라우마?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간혹 나의 잘못이 아닌 일로

연대책임을 지거나 독박쓰는 경우가 있으니, 억울함에 

나도 모르는 새 방어기제가 형성됐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불현듯 직전 직장 다닐 때, 회사 이사가 안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업무를 시켰던 때가 떠오른다.

그래도 직장상사의 지시니 그에 따랐고, 그 일로 나는 

다음날 아침회의 시간에 왜 그런 쓸데없는 일을 했냐며 사장한테 혼이 났는데, 

그때 이사는 끝까지 자기가 시킨 업무였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얼마나 억울했던가!


그래, 나의 방어기제는 전 직장 탓이다.

안 좋은 건 다 전 직장 탓이다! ㅋㅋ


어쨌거나 과잉 방어 성향을 보이는 나는 

정신이 좀 아픈 인간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오후 에피소드

공공근로를 다녀온 엄마의 표정이 별로더니

안 하던 짝꿍할머니 뒷담화를 하신다.

참고로 엄마는 아파트 단지 안 놀이터에서

공공근로 파트너인 '짝꿍할머니'와 청소 일을 하신다.


짝꿍할머니가 자꾸 놀이터 휴지통에 쓰레기가 개만 

들어있어도 (회전형)휴지통을 뒤집어 바닥에 쓰레기를 떨어뜨려 논다는 것이다.

엄마는 쓰레기 하나 때문에 휴지통을 비울 것 같으면

그 큰 휴지통이 무슨 필요가 있겠냐며 짝꿍할머니를 탐탁지 않아 했다. 

게다가 휴지통에 있는 쓰레기를 바닥에 떨어뜨려 놓고 치우질 않으신단다.

휴지통 있는 자리가 엄마의 청소 구역이다 보니

(놀이터 중에서도 엄마가 청소하는 구역과 짝꿍할머니가 청소하는 구역이 따로 있는 것 같음)

엄마가 치울 것으로 생각하고 그냥 두시는 모양이란다.

쓰레기가 있어야 할 곳은 휴지통인데

휴지통의 쓰레기를 땅바닥에 떨어뜨려 놓고는 치우질 않으신다?

이해는 잘 안 되지만, 대충 넘어가고 엄마한테 말했다.

“그 할머니한테 얘기해 봐. '쓰레기 좀 차면 버리죠' 하고..”

엄마는 그랬다가 혹여라도 서로 감정 상하느니 참는 쪽을 택하신 것 같았다.

“이제 3개월 남았다. 3개월만 참고 일하다 내년에는 근무지 옮겨달라고 해야지.. 

하여간 그 할머니랑은 안 맞아...”   


엄마는 짝꿍할머니를 많이 예민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며칠 전 짝꿍할머니가 어떤 아주머니와의 말다툼 후 병이 난 것도

(이 이야기는 '20화: 나는 공공근로자의 딸이다' 편에 나와 있습니다.)

 '너무 예민'하기 때문이라고.. 엄마는 보고 있었다. 그래서 대하기가 여러모로 조심스러운 모양이었고. 

엄마 왈, 체구까지 가냘픈 어른이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가리고 안 먹는 게 많아서 마른 데다 비실비실해.. 여태껏 식당 한 번을 안 가봤대.. 

바깥 음식은 불결하고 못 미더워가지고... 젊었을 적 회사 다닐 때도 

직원들이 회식 가자면 자기는 안 갔대.. 직원들한테 니들만 가는 게 미안하면 내 몫으로는 

스타킹이나 하나 사다 주라, 하고 안 갔대... 그렇게 입이 까다로워...

긍께 딸들이 엄마 뭐 좀 먹여보겠다고 오만 걸 사다주는디... 안 먹힌대...

그러니 기운도 없고 비실비실하지.."


전해 들은 짝꿍할머니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들을 종합해 보면

많이 깔끔하고 예민하신 분은 맞는 것 같았다.

어쩌면 어떤 강박 같은 게 있는 분일 것 같기도 했고.. 

이를 테면 휴지통에 든 쓰레기 하나도 참기 어려운,

휴지통 안이 휴지 하나 없이 깨끗해야만 하는 그런 강박(실제로 그런 강박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그분도 정신이 좀 아픈 분이실 테고... 

그렇다면 그냥 봐 드리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몸이든 정신이든

우린 다 조금씩은 아프기에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이 또한 문득 드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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