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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광 Jan 13. 2022

산책길에서 그대를 만나고.......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살그머니 집을 나와 산길로 접어든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밤새 길을 밝혀 온  가로등 몇 개가 지친 듯 파리하다.

약간 오르막으로 시작되는 산길은 어렴풋하게 산과 길의 경계를 가늠케 해준다.

미동도 없이 깊이 잠든 나무들과 숨죽이며 흐르는 냇물은 아직은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은 듯하다.

행여 그들이 깰세라 앞으로 내딛는 나의 발걸음도 조심스럽다.

그윽한 어둠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듯한 많은 소리를 꾸욱 누르고 있는 듯하다.

어둠을 헤치며 걸어갈 때마다 어느 것도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이 시간의 어렴풋함과 고요가 참 좋다.

세상의 바르고 그름, 좋고 나쁨의 구분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순수가 머물러 있는 지점이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서쪽 하늘엔 빛을 잃은 반달이 능선에 걸려있다.

어둠이 깊을 때면 찬란하게 제모습을 드러내던 달도 새벽이 오니 쫓기듯 사라지려 하고 있다.

때가 되어 사라지는 것들, 사라진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무작정 달려온 것들을 보면 쓸쓸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해야 할 일은 태산 같은데  마음을 고 돌아서기가 쉽지않다.

 아직 잠들어있는 순한 자연의 모습을 보니 지금껏 내가 힘겹게 키워왔던 세상에 대한 욕심이나 욕망도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와 서야 비로소 자연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사람답게 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곧 해가 뜨고 자연이 깨어나면 세상에는 예기치 못했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우리는 또 각자 다른 방법으로 살아갈 것이다.

때로는 희망을 얻고 때로는 후회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산촌에 살다 보면 겨울의 하루는 유난히 빠르게 지나가곤 한다. 잠시 가벼운 일에 눈을 돌렸을 뿐인데 앞산으로 떠올랐던 해는 벌써 서산으로 기울어져 있다.

차가운 날씨를 핑계로 집안에 들어박혀 빈둥거리자니 몸이 찌뿌둥하고 속은 더부룩하다.

눈을 뜨면 다가오고 서둘러 꼬리를 내리는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가끔 고민스럽다.

내겐 새로운 바람이 필요했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싶어  시작한 것이 아침 산책이다.

 집에서 성불사라는 까지는 2킬로 조금 넘게 떨어져 있고 길 옆으로 울창한 아름드리 고목들이 든든한 나의 친구가 되어주었고 나를 반갑게 품어 주었다.

    

성불교 삼거리쯤에 이르자 어둠은 완전히 걷히고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물소리와 숲에서 새소리가 들려온다.

숲을 지나온 바람은 갓 볶아 낸 것처럼 언제나 신선하고 상쾌하다.

결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하루가 지나면 다시  새롭게 만들어지기에 내가 맞이하는 아침은 상쾌함의 연속이다.

길을 걷는 내내 얼굴에 닿는 바람은 차갑지만 두꺼운 외투로 중무장한 채 걷다 보니 몸의 열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등에서부터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다.

잠시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멈추어 서니 유난히 넓은 길가에 나란히 선 노송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겨울임에도 넓고 푸른 가지를 펼친 건장한 모습이다.

그중 한 가지는 넓은 도로 위에 눕듯이 잎을 펼치고 있어 다가서는 내게 말을 거는 듯하다.  

   

“사람들이 이 길을 넓히느라 그동안 많은 동료들이 사라져 갔어, 그들과 함께 지내왔던 시간도 사라졌지, 호젓한 오솔길이 사라지고 횅하니 길이 뚫리니 마음까지도 황폐해졌어!  사람들마다 우리들이 함께 살았던 옛날이야기를 꺼내더군, 그림 같던 우리 인생도 이젠 볼품 없어졌어, 우우, 산에는 매일 바람의 연속이야, “  

    

나무들은 해마다 그가 살아온 기록을 몸속에 남긴다.

깊은 상처는 물론  맑음과 흐림, 가뭄이 심했거나 비가 많이 있었던 해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내가 잠시 쉬어가는 곳의 노송도 나란 존재를 기억할 자도 모르겠다.

나의 발걸음 소리, 나의 냄새, 나의 숨소리 까지도 그만의 방식으로 가슴에 새겨두고 있지 않을까?

     

” 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한동안 보이지 않아 걱정했어요. “     


. 이 세상 어딘가에서   남몰래 선행을 베풀듯 누군가 나를 지켜보며 염려해주는 이가 있다면 마음이  얼마나 든든해질까?

존재하지도 않는 일이 마치 실제처럼 부풀어 오르며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한다.  

   

이른 아침의 산책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가끔 내 안에서 볼멘소리가 들리고 갖가지 핑곗거리가 무성해지곤 한다.

 바람이 불거나 추운 날은  쉬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주장한다거나 신체 컨디션을 핑계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며 종종 내게 허튼 수작을 걸기도 한다.

나는 부단히 나 스스로에게 설득당하고 설득하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가장 확실하게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아침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내 몸이 가벼워지고 자신감도 충만해진다는 사실을 주지 시키는 노력이다.
갈수록 제자리에 안주하려는 마음을 떨치고  밖으로 나오는 용기가 요즘 내가 해야 할   큰 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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