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관계나 부모와 자식 간에 갈등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다. 상대에게 기대했고 실망했다는 의미다. 곧바로 따라오는 말은 ‘너를 사랑해서.’ 혹은 ‘너는 왜 그렇게 밖에 못해?’라는 불만이다.
아이를 위해서, 연인을 위해서 내가 했던 노력은 나의 선택이다. 상대가 원하지 않은 것들을 해놓고 상대를 죄책감 들게 만들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을 주면서 행복을 느낀다면 상대에게 뭔가를 바라지 않아야 한다. 자기 방식대로 사랑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상대가 아무리 좋은 의도로 나를 대해도 지칠 때가 온다. 상대만큼 해줘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고 상대의 마음처럼 따라가지 못하는 미안함이 커진다. 서로에 대한 마음의 불균형이 갈등으로 이어진다.
나의 부모 세대엔 자기 자신이 없었다. 자신을 위해 사는 게 잘 되지 않는다. 스스로를 위해 돈과 시간을 쓰라 해도 아까워한다. 성인이 되어도 자식들을 위해 더 해주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할 정도로 희생에 젖어있다. 스스로 뭘 원하는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잃으며 살았다.
책 『스토너』의 주인공 스토너는 1891년 미주리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농과대학에 진학했다. 나중엔 스스로 문학을 선택했지만 그 후의 삶은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우리 부모 세대처럼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는 지금까지 내면을 성찰하는 버릇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찾아 헤매는 일이 힘들 뿐만 아니라 살짝 싫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자신에게 내놓을 것이 거의 없다는 생각, 내면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 또한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_존 윌리엄스 『스토너』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젊은이들이 전쟁에 나가게 되었다. 스토너가 전쟁에 나가 싸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문장이다. 스스로가 가지 않을 거란 걸 이미 알고 있다.
해야 하는 일 앞에서 남 눈치를 보게 될 때가 있다. 다들 하는데 혼자 하지 않으면 질타를 받기 때문이다. 남 이야기면 조언이 쉽지만 본인 이야기가 되면 다르다. 목숨을 내놓는 일은 간단한 선택이 아니다. 주위에서 희생을 강요해도 스스로 죽을 각오의 의지를 불어넣지 않으면 힘들다. 스토너는전쟁에 나가지 않기를 선택했다.
스토너는 배우자의 선택과 결혼생활에서 소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다. 딸 그레이스를 돌보는 일엔 달랐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온 마음을 다 쏟아 딸을 돌봤다. 그때 스토너의 모든 열정이 살아났다.
희한하게 자식의 눈으로 부모를 볼 땐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나중에 부모가 되어서야 부모로 느끼는 책임감과 사랑을 어느 정도 알게 된다. 스토너는 부모에게 애정이 없었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보낸 뒤에야 어머니의 모습을 선명하게 봤다.
어머니도 이미 죽어버린 것 같았다. 어머니의 일부가 남편과 함께 저 상자 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이제 어머니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여윈 얼굴이 퀭하게 보였다. 피부가 늘어져서 가만히 있을 때조차 얇은 입술 사이로 치아 끝이 살짝 드러났다. 걸을 때는 무게도 힘도 없는 사람 같았다. _ 존 윌리엄스 『스토너』
스스로 경험하지 않고서 깨닫기 쉽지 않다. 마음이 막다른 곳에 다다르면 그때서야 와닿는다. 그레이스가 집을 벗어나기 위해 혼전임신을 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할 때였다. 아마 스토너의 마음이 무너졌을 것이다. 반면 그레이스의 마음도 어느 정도 이해되었다. 불안한 가정에서 사랑하는 방식을 제대로 몰랐다.
스토너와 그레이스는 마치 불행한 것처럼 보이는 삶을 묵묵히 견디며 살아간다.
사랑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떤 이에겐 추억으로, 때로는 불편하거나 편하게, 또는 희생으로 나타난다. 스토너가 딸에 대한 사랑은 딸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였다. 사랑은 어쩌면 주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이 제대로 정의 내릴 수 있다. 내가 하는 사랑이 받는 사람에게 고통이 아닌 따뜻함이 되어야 한다.
그 누구도 스토너에게 잘 살았다거나 못 살았다고 판단할 수 없다. 모든 삶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선택했고 그에 대한 책임을 졌다.
인생이란 사랑과 고독 사이를 방황하며 살아간다. 어차피 고독할 거라면 왜 사랑하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열정적인 사랑을 해보면 좋겠다. 그리고 상대를 위해 조금 손해 보거나 내 마음의 크기와 다른 사랑을 해보면 좋겠다. 그 안에 달달하고 쓰디쓴 감정들이 뒤섞여 내 심장을 뛰게 만들지도 모른다.
열정적인 사랑으로 모든 걸 쏟아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보일 것이다. 어쩌면 추하거나 스스로에게 실망할 수도 있다. 혹은 생각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 누군가를 생각하면 웃음 나는 기억의 한 조각이 힘겨운 삶에 쉼이 된다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